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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말 서울시 종로구 장사동에 위치한 세운상가 5층 중정. 이날 세운상가에는 오전부터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이날은 지난 2004년 이후 10여년이 넘도록 진전이 없었던 세운상가의 새 출발(도시재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세운상가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단순 재생 의미를 넘어섰다. 단순히 과거의 유산으로 남은 한 건축물을 현대에 맞게 새롭게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앞으로 서울 시민들이 이 도시를 어떤 도시로 만들어나갈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적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미래를 묻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운상가는 그간 우리 도시가 잊고 살았던 '연결'과 '참여'의 가치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서울 시민들이 찾고 싶은 장소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단절에서 연결을 생각하는 세운상가
우여곡절 끝 전면 철거 대신에 재생·보전 결정
주변지역과 연결성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과제
지난 1960년대 세워진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고(故) 김수근씨가 설계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만큼의 위상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서울의 대표하는 상권이자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렸으나 이제 세운상가를 위시한 이 일대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래다.
세운상가의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 같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과 현재의 초라한 모습 사이에 벌어진 간극, 다시 말해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선 이를 위한 디딤돌은 놓았다. 기존의 이명박·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 진행됐던 전면 철거 후 재개발 방식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작업이었다. 이런 가운데 박원순 시장은 2014년 3월 세운상가가 지닌 건축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고려해 이를 보존하면서 도시재생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가 전면 철거 방식이 아닌 도시재생을 택함으로써 과거와의 연결을 위한 시도는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적 단절을 극복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물리적으로 끊어진 공간의 단절도 해결해야 한다. 연간 전 세계 도시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영국 런던의 경우 물리적 공간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침에 하이드파크에서 상쾌하게 여정을 시작한 관광객이 바로 옆 버킹엄궁전을 구경하고, 다시 발길로 쉽게 닿을 수 있는 피커딜리서커스와 내셔널갤러리 등을 걷다 보면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발이 퉁퉁 부어오를 지경이 된다.
이는 런던이라는 도시가 물리적 공간의 단절이 없이 사람들이 걷고 싶은 매력적인 거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측면에서 세운상가 역시 종로·을지로·청계천로·퇴계로 등 주변 도로 및 지역과의 연결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도시는 사람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사람이 건강하려면 피가 잘 통하고 기가 막히지 않고 소화도 잘 돼야 하듯이 도시도 막힘 없이 잘 흘러가야 한다"며 "세운상가가 사람들이 찾아오고 늘 걸어 다니는 매력적이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세운상가 특유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측면을 동시에 개선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철거에서 시민참여 도시재생으로
주민설명회·자문단 구성 등 소통 내세웠지만
시민들 참여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물음표
세운상가는 그 시작부터 시민의 참여는 배제한 채 일방적인 하향식 행정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1967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터에 자리를 잡고 20년이 넘도록 살아온 영세 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운상가를 조성했다. 또 1984년에는 세운상가 지역 재개발 사업 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세운상가 활성화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6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종묘와 청계천을 잇는 대형 녹지축을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에도 시민 참여라는 개념을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번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이 다르다. 실제 서울시는 그간 주민설명회 17회 개최, 분야별 설계자문단 구성 및 운영 4회 등을 시민 참여와 소통의 증거로 내세운다. 다만 박 시장의 공언대로 시민들의 참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이영범 경기대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는 '세운상가 그 이상 : 대규모 계획 너머'라는 책에서 "시민 참여로 세운상가를 새롭게 탄생시키겠다고 하면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 공간 설계 국제현상공모'를 진행했다"며 "세운상가 고유의 장소성에 내포된 도시의 공공적 가치의 회복에 앞서 이 같은 방식으로 공모전을 진행하는 것은 공공적 가치를 내건 빅플랜의 재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과 박혜리 KCAP 건축도시설계사무소 팀장도 세운상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서울시의 방식에 대해 "데크 활용에 대한 현상설계를 선언적으로 진행한 다음 소통이 뒤따르고 있으며 여전히 소통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서울시가 '세운상가 재도약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발표하던 날 세운상가와 청계상가 사이에서 만난 한 상인은 과거 공중 보행교 데크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예전에는 없애야 한다면서 없애더니 이제 와서 또 왜 새로 만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는 현재 서울시가 지닌 시민 참여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운상가가 지닌 가능성과 가치
대도시 한가운데 보기 드문 제조업 생산기지
"건물 잠재력 결합해 미래의 내러티브 써보길"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세운상가가 흥미로운 이야기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세운상가를 둘러보고 간 해외의 전문가들은 세운상가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
샤를로테 바르테스 취리히공과대학 연구원은 "세운상가 지역의 좁은 골목길 사이를 걷다 보면 밀집된 도시 공간의 섬세함과 작은 작업장, 간이식당, 가게 안에 생동하는 에너지, 세운상가라는 근대건축 아이콘의 그늘을 가려주는 모든 생산적 활동에 놀라게 된다"며 "세운상가 일대를 재건축으로 밀어버리는 것은 서울시, 특히 세운상가 군 자체에 엄청난 손해"라고 말했다.
바르테스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처럼 세운상가는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제조업 기지다. 과거 이곳에서는 '탱크를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다. 고도화된 서비스업이 도심 중심부를 차지하고 제조업은 점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시대에 세운상가와 같은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나오미 하나카타 취리히공대 연구원은 도심 제조업 지역의 가치에 대해 "대부분의 현대 도시에서 이제 더는 볼 수 없고 없는 듯 취급한 것이 바로 도심 내 제조업이며 (사람들은) 신선한 농산물과 상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환경에서 생산되는지 실감하지 못하면서 상품 진열대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며 "세운상가의 수많은 작업장과 상점,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장인 정신은 여타 여러 도시가 지키지 못하고 안타깝게 놓쳐버린 잠재성"이라고 설명했다.
제프 헤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도시 및 지역계획과 교수도 "세운상가와 관련한 주변 이야기가 좋다"며 "이 빌딩이 지닌 요소들을 결합해 미래의 내러티브를 써보길 권한다"고 조언했다.
'건축가 김수근' vs '지식인 김수근'… 재평가론 부상 |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