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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월가 헤지펀드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지난 20년간 스타 헤지펀드 매니저로 군림해온 마틴 테일러가 2000년 설립한 네브스키캐피털을 청산하고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신흥시장 투자에 집중한 네브스키캐피털의 연평균 수익률은 20%에 가깝고 누적 수익률은 무려 64배에 이른다. 비록 2014년 1.4%의 손실을 냈고 지난해에도 별다른 재미를 못 봤지만 지난 15년간 헤지펀드 업계에서 상위 3%에 드는 성적을 올려왔다.
테일러는 고객 보고서에서 은퇴 이유에 대해 "가까운 장래에는 높은 수익률을 내기 어렵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신흥시장의 신뢰성 떨어지는 경제 데이터, 이들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 결정, 잠재적인 시장 위험 등의 요인 때문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고객들의 돈을 돌려줄 시기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로이터는 "테일러의 은퇴가 자산운용 규모가 3조달러에 달하는 헤지펀드 업계의 '탄광 속 카나리아(위험을 알려주는 전조)'라는 의문이 일고 있다"며 "연기금 등 고객들은 테일러보다 실적이 나쁜 대다수 헤지펀드들이 자금을 굴릴 데가 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고난의 행군에 들어간 헤지펀드 업계가 앞으로도 대규모 손실과 고객 이탈, 청산 압력 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1월 실적, 금융위기 이후 최악=헤지펀드 수난시대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됐다.
조사업체 HFR에 따르면 지난해 헤지펀드 수익률은 -1%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상승률인 -0.7%보다 더 저조했다.
지난해 8월 중국 인민은행의 기습적인 위안화 평가 절하, 12월 유럽중앙은행(ECB)의 추가 양적완화 같은 중앙은행발 대형 이벤트나 주식·원자재 시장의 혼란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올 1월에는 글로벌 증시 폭락의 여파로 1.7%의 손실을 나타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한 2008년 -2.7%를 기록한 후 최악의 성적표다.
일부 '큰손' 헤지펀드들의 사정이 더 심각하다.
대표적 행동주의 투자자 빌 애크먼이 이끄는 퍼싱스퀘어는 지난해 20.5%, 올 들어 이달 9일 현재 18.6%의 손실을 기록했다. 래리 로빈스의 글렌뷰캐피털과 찰스 콜맨의 타이거글로벌매니저펀드도 1월 각각 13% 이상, 14%의 손실을 봤다.
센베스트매니지먼트 역시 지난해 17%, 올 1월 12.6%의 자산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컨도 유가 상승에 베팅해 에너지 종목을 대거 매입했다가 셰니에르에너지 투자로만도 올 들어 2억달러의 장부상 손실을 냈다. 더구나 글로벌 경기둔화 등의 여파로 수익률이 개선될 기미도 별로 없다.
골드만삭스는 "저조한 미국 증시 상승률과 (유럽 등의) 마이너스 국채 수익률로 앞으로 5년간 헤지펀드 수익률도 연간 4%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자 이탈에 펀드 청산·M&A 잇따라=투자자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HFR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 헤지펀드에서 15억달러가 빠져나가면서 4년 만에 자금이 순유출됐다. 안정적 수익률을 중시하는 연기금이 대표적이다.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의 경우 지난해부터 헤지펀드를 당분간 운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대규모 손실을 낸 헤지펀드의 청산도 줄을 잇고 있다. 지난해 9%의 손실을 기록한 오렌지캐피털이 3일 남은 자산 10억달러를 돌려주겠다고 밝힌 게 단적인 사례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가운데 하나인 블랙록도 지난해 11월 1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어센트'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헤지펀드 창업 붐은 시들해지고 있다. 헤지펀드 조사업체인 프레퀸에 따르면 지난해 신생 헤지펀드 수는 223개로 200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부 헤지펀드는 고객 이탈과 수익률 하락이라는 이중고로 과거 인수합병(M&A) 주역에서 타깃으로 전락한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율리우스바에르는 카이로스투자운용 지분을 19.9%에서 80%로 늘렸다.
지난해 9월 사모펀드인 KKR은 마셜웨이스 지분 24.9%를 사들였다. 블랙스톤·골드만삭스·크레디트스위스 등도 우수인력 확보와 자금운용 다양화 차원에서 헤지펀드 지분 인수에 적극 나서고 있다.
/뉴욕=최형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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