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다오.’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명분은 안보. 최강국 스페인의 함대에 프랑스가 합세해 영국을 침공할 수 있다며 1628년 3월 1일, 세금을 내라는 포고문을 돌렸다. 세목은 건함세(ship money). 함정 건조를 위한 세금은 대헌장(Magna Carta·1215) 이전부터 존재했었지만 세금을 내야 할 귀족과 토지소유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납세지역이 이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건함세 징수지역은 해안가. 세금으로 건조한 군함의 혜택을 받는 곳은 바로 항구나 해안지역이라는 점에서 징수지역을 제한해왔다. 거의 잊어버린 세목인 건함세를 부활시킨 제임스 1세(찰스 1세의 아버지)도 수도인 런던과 해안지방에서만 건함세를 거뒀다. 수혜자 부담 원칙을 지켜온 셈이다.
반면 찰스 1세는 전국을 징세 구역으로 삼았다. 그럴 만 했다. 영국의 해군력이 워낙 보잘 것 없었던 까닭이다.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의 영국 침공(1588)을 막아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해군마저도 실은 국왕 소유의 함정 몇 척에 상선과 허가받은 해적인 사략선으로 구성돼 오합지졸과 다름없었다. 아르마다는 사실 영국 해군보다는 북해의 거친 폭풍우에 무너졌다.
엘리자베스 1세 사망으로 튜더왕조의 맥이 끊긴 뒤 친척이라고 모셔온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영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영국의 해군력은 더욱 망가졌다. 전통적으로 숙적인 스페인과 화친을 원했던 제임스 1세는 해군에 대한 투자를 꺼렸다. 한 차례 건함세를 걷어 건조한 국왕 소유의 전함마저 템즈강에 계류된 채 썩어갔다.
영국 연안을 알제리와 모로코,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의 해적이 휩쓸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손 잡고 영국을 침공하려는 마당. 다급해진 찰스 1세는 국채 강매 형식으로 17만 3,000파운드의 건함세를 전국의 각 지역의 떠 안겼다. 즉각 조세저항이 일었다. 종전의 건함세는 전쟁시 해안지역에 국한된 한시적 특별세였던 반면 찰스 1세의 건함세는 전국에 대한 항구적 목적세라는 반발이 의회에서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찰스 1세도 의회의 불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어떠한 과세나 공채도 강제 할당할 수 없다’는 내용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수용한 시기가 바로 건함세 징수 직후다. 문제는 국왕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 찰스 1세는 의회를 수차례 해산하며 각종 특별세와 관세로 재정을 꾸려나갔다.
1634년과 1635년에 부과된 건함세는 모두 31만2,000파운드. 연간 재정이 120만파운드 안팎이던 시절, 불만이 커졌다. 불만이 높아지고 ‘평시의 건함세 징수는 부당하며 전시라도 의회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소송도 걸렸다. 판결은 왕의 승소. 7대5라는 근소한 차이였다.
찰스 1세는 우쭐해졌지만 곧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한다며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킨 끝에 재정난에 봉착해 1640년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11년 만에 열린 장기의회는 왕에 대한 성토장으로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해산과 재소집을 거친 의회는 1641년 건함세를 없애버렸다.
왕과 의회의 대립은 결국 피를 불렀다.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 의회의 승리다. 건함세로 건설된 함대마저 의회 편에 서서 찰스1세의 처형(1649년)을 한몫 거들었다. 건함세는 그냥 소멸되고 말았을까. 왕의 처형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건함세는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 해군의 초석을 깔았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정책의 일관성. 건함세에 반대해 내전까지 치른 크롬웰 호국경의 공화국이 각종 항해조례를 발표하며 오히려 더 해군력 강화에 나선 점은 아이러니지만 정책 목표를 수용한 덕분에 영국은 바다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건함세는 조세행정과 정치에서도 분명한 교훈을 들려준다. 아무리 명분이 있는 세금과 정책 목표라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귀를 막은 통치자의 말로는 비참하기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떠나 일방통행은 언제나 위험하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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