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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가 채무 재조정을 거부하며 소송을 제기한 헤지펀드와 채무상환에 합의함에 따라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미국이 '달러 권력'을 남용해 고수익ㆍ고위험 자산에 투자한 자국 헤지펀드들에 막대한 수익을 챙겨줬다는 점에서 글로벌 금융질서를 또 한번 무너뜨렸다는 비판도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2월2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지난 2001년 디폴트 선언 이후 채무 재조정을 거부한 엘리엇매니지먼트 계열사인 NML캐피털·오릴리어스캐피털매니지먼트 등 4개 헤지펀드 채권단과 46억5,300만달러 규모의 채무상환에 전날 합의했다. 엘리엇을 이끄는 헤지펀드계의 거물 폴 싱어는 지난해 삼성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여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로 과거에도 미 법원에 소송을 내 페루·콩고의 국채 원금을 받아낸 바 있다.
이번 합의로 아르헨티나는 15년 만에 글로벌 금융시장에 복귀하며 경제회생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합의금액은 4개 채권단이 원금과 이자 등을 포함해 요구한 액수의 75% 수준이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1,000억달러의 대외부채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고 이후 채권단 대부분과 원금의 75%를 탕감받는 채무조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 채권단도 아니었던 이들 헤지펀드는 '세컨더리마켓'에서 다른 채권단이 내던진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2012년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고 결국 2013년 6월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미 법원은 이들 헤지펀드에 빚을 갚지 않을 경우 다른 채권자의 채무도 상환할 수 없다고 판결해 아르헨티나는 기술적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WSJ에 따르면 합의안이 아르헨티나 의회를 통과하면 이들 헤지펀드는 10~15배의 막대한 수익률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특정 국가의 부도→ 국제금융기관의 구제금융 및 채권단의 채무 재조정→해당 나라의 글로벌 시장 복귀'라는 전후 세계경제질서의 근본 틀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당장 파장은 베네수엘라 등 디폴트 위기에 처한 다른 나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28.3%에 이른다. 미국 자본이 베네수엘라 국채를 사들일 경우 엄청난 고금리를 받을 수 있고 부도가 나더라도 미국 법원을 등에 업고 원금을 보장받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게 된다. 반면 디폴트 국가는 장기간 빚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국가 간 갈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뉴욕=최형욱특파원 choihu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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