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바깥에서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이 해양경찰의 정선명령을 모른 채 도망쳤다고 치자. 다른 중국 어선들은 우리 해경을 방해하는 상황. 우리라면 여기에 대고 기관총과 물대포를 쏠 수 있을까. 물대포라면 몰라도 기관총까지 발사한다? 가능할까.
비슷한 일이 21년 전 오늘인 1995년 3월 9일 캐나다 인근 해역에서 일어났다. 장소는 뉴펀들랜드섬 부근 그랜드뱅크 어장. 캐나다 해양수산부의 순시정 케이프 로지호의 12.7㎜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목표는 스페인 트롤 어선 ‘에스타이(Estai)호’의 뱃머리. 정선 명령에 불응하고 그물을 끊은 채 도주하는 에스타이호는 총격에 속도를 줄이고 결국은 선내에 진입한 케나다 해양경찰에게 나포당했다.
같은 시각, 에스타이호를 구하려 다른 스페인 어선들이 몰려들자 캐나다 해안경비대의 2,650톤급 경비함 ‘윌리엄 그렌펠’함은 고압 물대포를 난사하며 접근을 막았다. 결국 에스타이호는 나포된 채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 항구까지 강제로 끌려왔다. 선원들은 모조리 감옥에 갇혔다.
발끈한 스페인은 당장 군사적 대응에 나섰다. 대서양에서 작전 중인 1,200톤급 초계함 아딸라야함을 현장에 급파하는 한편 캐나다 당국에게 ‘해적행위’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캐나다는 여기에 스페인이 무력으로 나온다면 무력으로 대응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출범 4년을 조금 넘긴 유럽연합(EU)은 스페인 편을 들며 ‘캐나다와 외교관계 단절’ 얘기까지 꺼냈다.
같은 서방국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캐나다와 스페인으로 하여금 전쟁 불사까지 외치게 만든 요인은 생선. 가자미(Turbot)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대형인 1미터급의 가자미가 잡히는 그랜드뱅크 황금어장에서의 조업권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가자미를 둘러싼 어업 분규의 기본적인 배경은 어획량 감소. 서구인들의 선호도가 높은 대구(Code) 어획량 급감에 따라 캐나다 정부가 어족 자원과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대구 조업 금지령’을 내린 이후 각국의 대체 어종 발굴과 어획고 확보 경쟁이 ‘에스타이호 사건’을 불렀다. 스페인 등 EU 국가들이 캐나다에 요구했던 어획쿼터 75%가 무시되고 14%만 할당됐다는 점도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캐나다는 나포의 명분으로 국내법(연안어업 보호법) 위반을 내세웠다. 불성실한 조업 보고는 물론이거니와 불법 어구를 사용해 치어와 금지 어종을 남획했다는 증거를 들이댔다. 스페인은 이를 부인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국제여론은 스페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나포 지점이 200해리 경제수역도 벗어난 공해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본 때를 보여주겠다’며 ‘교훈용’으로 에스타이 나포를 지시했던 캐나다 해양수산부 장관 브래이언 토빈에게는 ‘캡틴 캐나다’와 함께 가자미와 영화 제목 ‘터미네이터’를 합성한 ‘터보네이터’라는 별칭이 따라 붙었다. 일부에서는 당시 나이 41세의 토빈 장관이 전국적인 명성과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려 ‘공해상의 나포’라는 강경책을 썼다는 분석도 나왔다.*
에스타이호 나포 사건은 결말은 발발 한 달이 조금 지나 나왔다. 억류 선원은 진작에 풀어준 캐나다는 EU와 협상 끝에 4월 중순 선주에게 4만 1,000달러를 피해 보상하는 선에서 EU와 협상을 끝냈다. 각국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가 맺어졌다고 여겼지만 스페인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풀지 않았다. 승소를 자신했던 것이다. 결말은 어떻게 났을까. 예상을 뒤엎고 캐나다가 이겼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998년 12월 ‘이 분쟁에 대한 재판 관할권이 없다’고 판결, 캐나다의 손을 사실상 들어줬다. 뜻밖의 판결에는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인근 연안어업국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9년까지 뉴펀들랜드섬을 영국령으로 유지했던 영국도 적극적으로 캐나다 편에 섰다. 가자미 전쟁에서 앵글로색슨이 라틴을 누른 셈이다.
물고기를 둘러싼 인간들의 다툼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예부터 청어와 대구를 둘러싸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세계 각국은 바닷가재에 이르기까지 내 것, 네 것을 가르기 위해 싸운다. 인구는 늘고 전세계 어획량은 감소하는 요즘도 세계 곳곳의 어장에서 분규가 일어난다. 분쟁이 멎으려면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에 국적 인식 칩이라도 심어야 하는가 보다./권홍우논설위원겸선임기자 hongw@sed.co.kr
* 토빈 장관은 유명세를 바탕으로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해 2000년까지 뉴펀들랜드의 주지사를 지냈으나 정치 생명은 2002년 산업부 장관을 끝으로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민간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했다. 가자미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했던 토빈의 정치 역정은 외부와의 긴장을 유발해 대중의 주목을 끌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변형된 포퓰리즘의 한계를 말해주는 사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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