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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의 교통사고 이후 생계가 막막해진 정혜란 씨는 "트럭 하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남편의 말에 36개월 할부로 중고 트럭을 구입했고 이 '복덩이' 덕에 빚도 갚고 내 집 마련의 꿈까지 이뤘다. 결혼 30주년을 맞은 이 노부부의 사연을 접한 작가 박문희는 그들의 고생스러운 시절을 사막으로 표현했다. 그 척박함을 뚫고 자라나는 생명의 이미지로 자동차 부품들이 쓰였다.
#2. 스물 다섯에 만나 첫눈에 반한 첫사랑을 '첫 손님'으로 태우고 싶어 전 재산을 털어 자동차를 산 손기동 씨는 아내와의 여행과 추억을 차에 담았다. 폐차가 결정된 23살의 자동차 사연을 들은 협업작가 김기라와 김형규는 차량 주인과 자동차의 마지막 여행을 360도 카메라로 기록했다. 또한 폐차될 차를 비석처럼 재가공한 작가는 '잘자요 내사랑!'이라는 작품명을 붙여주며 개인의 삶을 역사적 기념비로 만들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폐차 직전의 자동차가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동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브릴리언트 메모리즈'전이 서울 노원구 소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4월21일까지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공동기획한 것으로 공모로 뽑힌 8명의 사연에 12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했다.
사진작가 이주용은 1995년식 승합차 '그레이스'의 내부를 비운 다음, 하늘색으로 칠하고 그 안을 들꽃으로 가득 채웠다. 여중생이던 아내가 장모님의 차를 물려받아 동고동락하며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21년을 품은 자동차다. 차창에 설치된 홀로그램 이미지는 그 안을 들여다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잡히지 않는 기억을 더듬게 한다. 추억은 냄새로도 되살아난다. 부모의 이혼으로 중학생 때 헤어진 어머니를 14년 만에 다시 만난 사연자는 1년도 안돼 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차를 물려받았다. 작가 박재영과 다운라이트프로덕션은 어머니가 방향제처럼 차 안에 두었던 모과향, 화장품 향기, 창 밖 빗물 냄새 등으로 추억을 곱씹었고, 관객은 직접 승차해 이를 경험할 수 있다.
홍원석 작가는 '아트택시'라는 콘셉트로 자신이 직접 서울 동북부 5개구 지역을 택시처럼 운전하고 다니며 지역민들과의 소통을 예술경험으로 만든다. 작가 전준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승용차에서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을 발견했고, 이를 움직이는 조각으로 제작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진보와 발전을 꿈꾸는 인간의 노력을 구현했다.정연두 작가는 탈북 새터민이 "남한의 첫인상은 거리를 가득 채운 국산 자동차였는데 그 낯선 풍경이 믿기지 않아 사람들이 속인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한 것을 기반으로 11개의 이미지를 재조합한 사진 신작을 내놓았다. '비엔날레급' 굵직한 작가들은 향후 이 전시가 유럽과 중국 등지에도 수출될 것을 감안해 선정됐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자동차라면 보통 물질성과 속도감을 생각할 뿐이지만 이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게 미술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공공미술관이 기업의 예산 지원을 받아 전시를 기획한 것에 대해 기혜경 서울시립미술관 운영부장은 "미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미술관이 추구하는 가치 실현에 더욱 몰두했다"고 밝혔다. 미술계에 전방위적 후원을 쏟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조원홍 부사장은 "아날로그 가치가 부각되고 아날로그 감성이 중요시되는 이 시대에 자동차가 삶의 동반자이자 추억을 만들어가는 일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라며 "기술과 예술, 기업과 미술의 상생관계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박성규기자 exculpate2@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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