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경이롭다. 봄은 나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칙칙했던 나뭇가지에 아주 밝은 초록색 작은 봉우리가 불쑥 솟아나 있다. 지극히 연약하고 어리고 어린 새싹이 저 두꺼운 나무를 뚫고 나온다. 봄은 새싹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봄의 기운으로 쏟아나는 새싹은 차츰 나무의 모습을 새롭게 바꾼다. 그 바뀐 모습이 참 아름답다.
사람의 마음을 본다. 사람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칙칙한 나쁜 마음들, 칙칙한 두려운 상상들, 칙칙한 염려스러운 일들, 칙칙한 미움, 분노, 질투, 시기…. 이러한 껍질을 깨고 솟아나는 밝은 생각들, 감미롭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순종하며, 나를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넓은 마음, 어려움 당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저절로 몸이 가고 손이 그를 향해 펴지는 행동,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행복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을 바꿀 수 있는 봄은 무엇일까? 종교다.
기독교는 봄에 부활절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창조자를 향한 사랑을 떠났고 불순종했다. 참으로 교만했다. 반대로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창조자께 순종하고 사랑했다. 참으로 겸손했다. 첫째 아담은 죽음을 인간에게 주었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었다. 그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봄이 칙칙한 나무에 밝은 새싹을 솟아나게 해 변화를 이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칙칙한 추악한 인간을 밝은 인간으로 이끌었다. 봄이 새싹을 솟아나게 해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을 탈바꿈시켜 창조자를 사랑하며 온전히 순종하게 한다. 봄이 희망을 만들 듯이 부활은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만든다. 봄이 신비롭듯이 부활이 신비롭다. 봄이 칙칙한 나무들에게 희망을 주듯이 부활이 자신을 추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봄이 모든 나무들에게 유익을 주듯이 부활이 온 인류에 유익을 준다.
봄이 초록색으로 산을 통일시키듯이 부활은 인간을 창조자 중심으로 통일시킨다. 봄이 부활은 아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듯이 십자가의 고난을 지나 기쁜 부활이 오는 비슷함이 있다.
봄에 나무가 새롭게 태어나듯이 누에도 나비로 거듭 태어난다. 누에는 처음엔 고치 안에 갇혀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밀려오는 스케줄은 인간이 누에고치에 갇히게 한다. 이유 없이 괴롭힘을 누군가로부터 계속 당하면 마음이 눌려 누에고치 안에 파묻히고 만다. 때론 인간은 알고도 죄를 지으면서 어두운 누에고치를 찾아 더 깊이 들어간다. 사람은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자신이 너무나 깊고 두꺼운 누에고치에 갇혀 있는 걸 알지 못한다. 때로 인간은 무지할 때가 있다. 재물을 쌓아 놓으면 자유를 만끽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인간을 속박한다. 재물은 수많은 연줄을 창출해 인간에게 자유를 억압한다. 마약을 복용하면 자유를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마약이 인간을 속박한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도박을 시작한다. 그 도박이 인간을 속박한다. 감당키 어려운 스트레스를 인간에게 쏟아 붇는다.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된다. 인간도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 그 자유를 누려 본 사람은 결코 그 누에고치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인간에게 존엄성이 무엇인지 맛보게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봄이 칙칙한 나무를 바꾸듯이 인간도 새롭게 변신한다.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면 가정도 더 밝아지고 사회도 더 밝아진다. 그랬으면 좋겠다.
하충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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