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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만종…마피아?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섬 팔레르모. 도심에서 800m 떨어진 스피리또(Spirito Santo·성령) 교회 앞에서 사달이 났다. 부활절 저녁 축제에 끼어든 프랑스군의 하급 간부가 젊은 부인을 희롱하자 격분한 남편이 칼을 내리쳤다. 유부녀를 괴롭히던 프랑스군은 바로 죽었다. 군인이 대응하려는 순간 군중들이 외쳤다. ‘침략자, 프랑스군을 죽여라!’ *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교회의 마지막 종소리(晩鐘ㆍVesper)이 울릴 즈음, 상황 종료. 교회 앞의 소규모 프랑스군은 모두 칼을 맞았다. 만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부활절을 기념하려 모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무리 지어 다니며 점령군과 그 가족을 찾아 다니며 몰살시켰다. 이튿날 아침 동틀 무렵에는 프랑스군과 그 협력자 가족의 남녀노소 시체 2,000여구가 나뒹굴었다.

13세기판 세계대전이라는 시칠리아 독립운동(War of the Sicilian Vespers, 1282~1302)의 막이 이렇게 올랐다. 왜 세계대전인가. 당시 유럽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지중해를 낀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지역 국가들, 비잔틴 제국에 교황청까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20년간 동안 이어질 독립전쟁의 서막인 만종의 봉기에서 시칠리아인들은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

독립군은 만종의 봉기 6주 만에 메시나 항구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체를 손에 쥐었다. 교황의 지원을 받아 14년 전부터 시칠리아를 점령,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군림해온 프랑스 앙주 가문의 샤를 1세는 얼마 뒤 메시나 항구까지 잃었다. 전력을 다해 키워온 함대도 이때 불탔다. 앙주 가문은 당시 서유럽 최고의 해양 세력 중 하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남부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 예루살렘, 아프리카 튀니스까지 지배하던 해군력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서 로마교회를 통합하겠다던 샤를 1세의 야망도 꺼져버렸다.

함대까지 몽땅 잃어버린 샤를 1세의 보복이 두려웠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전의 지배가문이었으나 연전연패로 대가 끊어진 독일 호헨슈타우펜가의 방계 가문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아라곤은 함대와 병력을 보냈다. 점점 커진 싸움은 교황과 프랑스, 시칠리아, 아라곤,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 비잔틴제국이 끼어드는 국제전으로 번졌다.

시칠리아 독립전쟁은 발발 20년 만에 아라곤의 시칠리아 통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서구세계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력을 잃었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투입될 주요 국가들이 반목했기 때문이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시칠리아 독립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프랑스 앙주 가문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주장. 교황청의 권위가 이때부터 약해졌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지에 의해 2011년 ‘100대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로버트 카플란은 저서 ‘지중해 오딧세이(원제 Mediterranean Winter)’를 통해 시칠리아 독립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바티칸이라고 강조한다. 국가나 영주가 면종복배하면서 교황청이 갖는 권위가 흔들려 아비뇽의 유수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분열과 환멸이 더욱 커져 종국에는 종교개혁이라는 대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봉기를 일으킨 시칠리아 사람들은 편해졌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점은 하나 있다. 시칠리아 주인은 더욱 많이 바뀌고 생존을 위한 눈치 보기도 더욱 심해졌다는 추정이다. 화산섬으로 비옥했던 시칠리아는 오랜 옛날부터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붙었던 지역. 예수 탄생 훨씬 이전부터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니키아의 세력 각축장이었고 로마와 카르타고간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자 무대였다.

로마제국의 식량 창고 노릇이 끝난 뒤에는 비잔틴제국의 소유물이었다가 이슬람 교도들의 사라센 제국 통치를 거쳐 바이킹의 지배까지 받았다. 독일 호헨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 앙주 가문의 뒤를 이어 독립전쟁 덕분에 시칠리아의 통치자로 나선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이후에도 이탈리아 사보이 왕국, 스페인, 나폴레옹의 프랑스, 이탈리아 통일까지 수많은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시칠리아에는 살아남기 위해 눈치 보기와 네트워크라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굳혔다.

가족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족 중심으로 단결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의식이 시칠리아만큼 강한 곳은 없다. 가족과 친족간 네트워크로 시작했다가 기업형 범죄 조직으로 커진 미국 마피아의 여명기를 시칠리아 출신 5대 패밀리가 주도했다는 점도 시칠리아의 역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마피아가 만종의 봉기로 촉발된 독립전쟁기에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이탈리아는 외친다, 프랑스에 죽음을!(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라는 구호의 단어 첫 철자 조합에서 마피아(MAFIA)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몇몇 책자가 있지만 구전에 의한 것이어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젊은 부인을 희롱한 프랑스군을 남편이 칼로 살해하자 프랑스군이 교회 앞에 모인 군중들을 도륙해 이 소식이 퍼져 봉기가 발생했다는 설부터 점령군인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고도로 기획된 음모가 있었다는 설까지 다양한 구전이 있다. 봉기의 낌새를 알아챈 프랑스군이 무기를 수색한다며 여성들의 가슴을 더듬자 남자들이 더욱 분노하고 단합했다는 얘기도 있다. 공통점은 두 가지다. 프랑스군의 여성 희롱과 시칠리아인들의 분노. 프랑스의 시칠리아 점령 정책이 예전의 지배자처럼 온건했다면 만종의 봉기는 발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악행이 피의 대가를 부른 셈이다.

**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구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시칠리안인들의 만종(Les vepres siciliennes)’은 부활절의 봉기 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열띤 호응을 받았다.

*** 마피아의 유래와 어원에 대해서도 수많은 풀이가 있다. 의적이나 독립투사, 또는 마을의 현자에서 비롯됐으며 처음에는 선의의 사례비가 훗날 보호비 갈취 등으로 변질됐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시칠리아의 마피아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뭇솔리니 집권기. 마피아를 극도로 증오했던 뭇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대거 갇혔던 마피아는 연합국의 진군에 협조하며 다시 살아났다. 전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탈리아에서 좌파의 득세를 막기 위해 마피아 조직이 기독민주당을 지원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정·재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마피아와 유착관계는 전통과 전후 처리가 만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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