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먹을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안창살 사줄게.”
일요일 이른 저녁, 모처럼 형님 부부가 집에 들렀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온 겁니다.
형의 제안에 어머니께서 그늘진 표정으로 말씀하십니다.
“고기 많이 먹으면 안 좋아.”
“그럼 냉면 어때요? 평양냉면!”
내 제안에 형수님이 빙긋 웃으며 물으십니다.
“서방님, 어제 술 드셨죠?” “네... 빙고...”
‘평가옥’ 물냉면, 속이 풀립니다.
어젠 왜 또 그리 들이부었는지.@_@;;
차게 만든 해장음식은 아마 냉면뿐일 겁니다.
언제부턴가 평양냉면이 인기입니다.
우래옥부터 을밀대·필동면옥·서북면옥까지, 지역별 냉면식당을 열거한 곳들은 항상 방문객들로 북적댑니다.
평양냉면은 보통 30대 중반 이후, 청년기가 시들 무렵부터 당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인생의 맛’이란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음식입니다.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얼굴에 새겨진 삶의 나이테만큼 슴슴하고 담백한 맛을 즐겨찾게 되는 듯합니다.
가격은 비쌉니다. 한 그릇 1만1,000원, 갈비탕보다도 고가입니다.
하지만, 음식의 재료를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평양식 물냉면의 육수는 고기와 사골을 푹 고아 만듭니다.
쉽게 말해, 곰탕이나 설렁탕을 시원하게 식혀 밥 대신 메밀국수를 담아 내오는 셈입니다.
국수가 아니라 육수에 참맛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로 뚝뚝 끊어먹을 수 있어, 치아가 시원찮은 중장년층이 반깁니다.
그런 논리로, 국물 없는 비빔냉면은 왜 가격이 똑같은지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주전자에 주는 육수로 너그럽게 퉁치시죠.
냉면을 처음 먹었던 때는 중학생이던 1989년 5월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점심 무렵 아버지를 따라 읍내 냉면집으로 향했고, 공산당 삐라처럼 붉은 빛 비빔냉면은 질기고 매웠습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빨갱이의 맛’이었습니다.
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 평소 음식을 남기면 심하게 꾸짖으시던 아버지가 웬일인지 그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은 아렸지만, 허기가 더 강렬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400원과 바꾼 너구리 두 마리를 몰고 왔습니다.
‘농이’와 ‘심이’를 끓는 물에 부숴 넣으며 다짐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냉면 따위 먹나 봐라!”
이후 세월이 흐른 군바리 시절, 병장으로 진급한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 중대 막내와 함께 4박5일 휴가를 나왔습니다. 이 녀석 집이 부산이라 밥이라도 먹이고 보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돼지 목살과 삼겹살, 그리고 설렁탕에 소주를 부었습니다.
십 원짜리 동전도 씹어 삼킬 듯한 소화력에, 주인 아주머니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군인 오빠, 잘 드시네. 이거 서비스야. 그냥 들어요.”
물냉면이었습니다. ‘금냉 8년’의 다짐은 그렇게 깨졌습니다.
어느새 어머니가 수저를 내려놓으십니다.
만두전골보다 냉면이 더 맛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난 비빔냉면만 먹었는데...”
“엄마, 평양냉면 처음 드세요?”
어머니가 멋쩍게 대답하십니다.
“응. 처음인데 맛있네. 국물이 담백한 게 계속 찾게 된다.”
순간 가슴 속에 뭔가 뜨거운 게 일렁였습니다.
죄책감이었습니다.
‘평양냉면 한 그릇도 안 사드리고 지금껏 뭐했냐...’
그렇게 식당을 나섭니다.
어머니의 흐뭇해하시는 표정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됩니다.
앞으로는 고집을 피워서라도 어머니를 자주 모시고 다녀야겠습니다.
이제 건강한 몸으로 맛있게 음식을 드실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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