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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논단] 21세기 '서희 외교' 과학과 외교의 만남에서

이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이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1851년 5월 1일, 영국은 런던에서 세계최초의 만국박람회 개최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진보된 과학기술력을 전 세계에 한껏 과시했다. 이날 선보인 철물과 유리로 어우러진 7만㎡에 달하는 박람회장 수정궁은 전대미문의 웅장한 모습을 선보였고, 영국은 팍스 브리테니카 시대의 도래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과학외교의 장으로 만국박람회를 적극 활용했다. 최근 과학외교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주요 핵심 외교 어젠다가 정치, 안보에서 과학기술 기반의 경제, 자원, 문화 등으로 다원화되고, 특히 기후변화, 전염병, 재난재해 등 과학기술로 해결책을 제시해야하는 전 지구적 도전과제의 증가는 과학기술을 국가외교의 중심으로 밀어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과학외교는 어제 오늘의 이슈는 아니다. 4~5세기경 고대 일본의 야마토 왕조는 백제에 외교·군사협력의 조건으로 도공(도자기), 야공(금속), 와공(기와) 등의 대대적인 기술지원을 요구한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또한 그야말로 대규모 과학외교사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50년의 역사가 시작된 KIST 설립도 한미 양국간의 과학외교 산물이었다. 당시 미 행정부가 대통령 과학고문을 KIST 설립조사단 단장으로까지 임명하면서 KIST 설립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에는 단순한 과학기술협력과 대외원조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결국, 고대부터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외교의 중요한 수단이자 목적으로 활용되어 온 것이다.

최근 들어 선진각국의 과학외교역량 강화 노력은 더욱 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은 2007년 과학외교 4대 목표를 설정하여 구체적 정책실행을 본격화하는 중이고, 미국은 2008년 과학진흥협회 (AAAS) 산하에 과학외교센터 설립을 통해 체계적인 연구와 인력양성을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영국은 외교부처 내에 수석과학자문관 제도를 두는 등 전문 과학외교관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럼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도 지난해 세계과학정상회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과학외교의 전기를 마련한 바 있다. 또한, 지난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과학기술 외교역량 강화방안이 의제로 논의되는 등 본격적인 관련 정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학외교 추진의 일관성 및 지속가능성 확보, 관련 부처간 연계·협력·조정기능 강화, 과학기술 현장의 전문역량 활용 확대 등은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과학외교가 과학기술 발전 그 자체를 넘어,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의 다름을 보완하고 전 세계를 관통하는 효율적인 수단임을 인식하고, 그 기반 정비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효율적인 과학외교 수행을 가능케 하는 민-관 협력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과학외교를 총괄하는 종합컨트롤타워 마련과 외교현안별 조정체계 구축이 이루어진다면 예산투자 및 사업추진에서 나타나는 부처간 크고 작은 엇박자는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일선 현장에서 글로벌 협력을 담당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 및 체계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과학외교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학자들의 전문적 지식과 의견을 담아내는 것이 기본이다. 실제로 남극조약 체결 당시, 오랜 기간 관련연구를 통해 전문지식을 축적한 과학기술인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없다. 또한, 과학외교의 대상과 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 과학외교를 선진국의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한 국제협력 수준을 넘어 다음세대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신흥국 및 개도국으로 다변화해야 한다. 또한 그 방식도 단순 과학기술공여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과 교육, 제도, 행정체계, 그리고 우리기업의 현지 진출까지 패키지화 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난 50년, 과학외교의 산물인 KIST 설립으로 시작된 우리 과학기술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성장의 신화를 만들어 왔다. 주변 4강에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힘의 논리로 국제관계를 풀어갈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국제사회에 경제·자원·문화 등 소프트파워 강화는 물론 국격제고라는 시대적 사명을 요구받고 있다. 고려시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여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희(徐熙)의 지혜가 과학외교를 통해 21세기 다시금 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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