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은 유연성과 안정성으로 평가합니다. 유연성이라고 하면 통상 노동시장 환경이 변할 경우 기업과 근로자가 고용·임금·근로시간 등을 신속하게 변화시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의미하지요. 한편 안정성이란 예전에는 현재 직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의 안정성을 의미했지만 이제 실직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빨리 찾아 평생 일할 수 있는 기간을 늘리는 고용의 안정성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 됐습니다.
과거에는 해고를 쉽게 만들면 안정성은 하락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해고가 조금 쉬워져 기업이 신규 채용에 주저하지 않게 되면서 보다 빠른 시간에 새 일자리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경험이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정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바로 유연안정성(flexicurity)의 핵심입니다.
유연안정성을 바탕으로 노동시장 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나라는 네덜란드와 독일입니다. 정규직 고용조정을 조금 쉽게 만들어 기업이 신규 채용을 주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이들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이었지요. 그리고 이런 개혁이 오히려 일할 기회를 늘려 기존 근로자뿐 아니라 실직자까지 보호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은 정규직 노동시장 유연화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으로 우려해 강렬히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항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정치적 계산만 앞세웠던 지난 1990년대 말 이탈리아나 2000년대 중반 프랑스의 노동시장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이런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정규직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뛰어넘을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사례가 바로 최근의 프랑스와 영국의 노동시장 개혁입니다.
☞ 유럽 사례서 배워야
伊 등 노동 유연화 시도했지만
강력한 저항탓에 개혁 물거품
결국 비용만 늘고 일자리 실종
“유연성·안정성 동시 추구 가능”
독일·네덜란드는 개혁에 성공
☞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1970년대까지 잘나가던 그리스
포퓰리즘 남발하다 살림 거덜나
기업 인력조정 자율성 높여준 佛
무분별한 파업에 제동건 英처럼
과감한 개혁 주저하지 말아야
2000년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명분 아래 ‘주35시간근로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표를 의식한 나머지 근로자들의 월급은 줄이지 않고 근로시간만 줄였지요. 그 결과 노동비용은 증가했고 일자리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최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노조와 합의시 46시간, 초과근로를 포함하면 주60시간까지 근로시간을 늘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초과근로수당의 가산금도 현행 25%에서 10%로 낮췄습니다. 초과수당 가산금이 50%이고 휴일근로·야간근로에는 각각 50%씩 중복 할증하자는 우리 정치권과는 사뭇 다릅니다. 또 올랑드 대통령은 경기침체로 경영상 필요가 생기면 산별노조와 타결한 단체협약을 따르지 않고 근로자들과 개별적으로 근로조건을 협의하도록 했고 경영실적이 악화돼 수익이 줄어든 경우에도 인력조정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영상 해고의 조건을 6~7개씩 나열해 모두 충족될 때만 해고가 가능하다는 우리 정치권의 입법안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다른 국가에 비해 노동시장 사정이 유연한 영국도 추가 개혁에 나서고 있습니다.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는 기득권의 저항을 뛰어넘기 위해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억제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우선 파업 찬반투표에 최소 투표율 요건 50%를 신설했고 핵심 공공사업장에 대해서는 찬성투표 수가 유권자의 40%를 넘어야 한다는 규제를 추가했습니다. 극소수의 투표 참여와 참여자 과반의 동의로 파업이 가결되던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파업시 사측은 파업인력을 파견직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대체근로도 허용했습니다. 전체를 위해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 파업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노동시장 개혁과정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정규직 고용보호 완화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고 노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그나마 추진되던 노동시장 개혁도 멈춘 상태입니다. 시장원리와 나라의 미래는 무시한 채 표만 된다면 어떤 정책도 서슴지 않고 추진하는 정치권도 문제입니다. 1950년부터 1973년 사이 그리스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 나라가 ‘표퓰리즘’ 정책 남발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인한 노동시장 경직화로 지금의 말썽꾸러기 그리스가 됐습니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2000년 이후 9년간 평균 5% 이상 성장하던 우리나라가 최근 4년 동안 평균 2.8% 성장하는 데 그쳤습니다. 우리도 10년, 20년 후 지금의 그리스가 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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