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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벳공 로지...젊은이에게 일과 희망을!





질문 하나. 아래 사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힌트가 있다. 때는 1944년 미국. 군에 납품할 무선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는 그녀는 18세의 유부녀였다. 결혼 22개월 만에 다섯 살 많은 남편이 태평양 전선으로 떠나자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여성이다.





만약 이 여성을 한눈에 알아봤다면 눈썰미가 대단한 사람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각주로* 넘기고 이 여성이 일하던 시기를 기억해보자.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다. 전쟁은 ‘가정에서 얌전히 일하는 게 미덕’이었던 미국 여성의 역할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공장에 나가 일하는 게 아름다움이며 절대 미덕으로 부각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었으니까.

제2차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 미군의 총병력은 약 30만명. 유럽과 아프리카, 소련으로 전선이 확대되어도 직접 참전만은 꺼리던 미국은 1941년 말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가장 많을 때 미군 병력이 1,647만명. 순식간에 거대한 군사력을 건설하는데 두 가지가 필요했다. 병력과 장비.

병력 수급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미국 인구가 약 1억3,300만명. 청장년 남성들을 군인으로 양성하면 병력을 꾸릴 수 있었다. 문제는 장비. 생산활동에 참가하는 청장년층이 전선으로 대거 빠져나가면 인력이 모자라고 군수품 생산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대안으로 모색한 게 바로 여성 노동력 활용의 극대화였다.

비서직이나 전화 교환수, 군복 제작을 맡던 여성 인력은 미군이 늘어나는 속도와 맞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소총 결합과 탄약 생산부터 야포와 전차, 함정, 항공기 제작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힘이 많이 들어 남성 노동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리벳 박는 일도 여성이 맡았다. 1943년 초에는 이런 대중가요도 생겼다. ‘그녀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네/ 승리를 위해 일하면서/ 비행기 동체에 앉아 있지/ 그 작은 아가씨가 남자보다도 많은 일을 해낸다네.’ 미국 전시광고위원회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가요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의 가사 중 일부다.

얼마 안 지나 ‘로지’는 국민적 영웅의 상징물로 떠오르고 무수히 많은 선전물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라는 포스터(이 기사의 표지)가 널리 깔렸다. 비슷한 시기에 중장비를 무릎에 놓고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30대 전후의 백인 여성의 포스터가 ‘록웰의 로지’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실리고 전국에 퍼졌다. 마치 작업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한 강인한 팔뚝은 중성 이미지까지 풍긴다. 미국 역사와 대중 문화사에서 여성이 이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기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전쟁물자를 생산해내는 근육의 힘이 절박하게 필요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록웰의 로지’ 포스터가 나온 지 불과 보름 만에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을 ‘리벳공 로지’라고 여기며 땀흘리던 1943년 6월8일, 극적인 기록이 나왔다. 폭격기 생산라인에서 21세 여성 노동자가 6시간 동안 리벳 3,345개를 박아 넣은 것. 남자보다 두 배 이상의 생산속도를 낸 주인공은 마침 이름도 로지(Rosie Bonavita)였다. 로지는 연일 언론에 소개되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감사 편지까지 받았다.

허구의 가공 인물에 실제 영웅까지 ‘리벳공 로지’는 분명한 역할을 해냈다. 여자도 중노동을, 그것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며 종전 무렵 여성 노동자가 2,200만명까지 늘어났으니까. 미군에 직접 입대한 여군과 약 300만명의 적십자 회원을 빼도 1,850만명의 인력이 농장과 공장에서 각종 생필품과 전쟁 물자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중 미국은 함정 6,500여척, 항공기 29만6,400대, 탱크 8만6,330대, 상륙용주정 6만4,546대, 지프와 트럭 등 차량 350만대, 소총과 카빈총 기관총 1,200만정을 토해냈다.** 여성 인력은 이같이 경이로운 기록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조선산업의 경우 여성 인력 비중이 60%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떤 여성들도 감당할 수 없었던 막대한 생산을 주도한 것은 ‘리벳공 로지’로 상징되는 미국의 여성노동력이었다.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은 ‘중노동하는 게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젠더 이데올로기까지 만들어냈다. 그 증거물이 수많은 포스터들이다. 미국의 ‘세계의 101대 캐릭터 사전’이라는 책자는 리벳공 로지를 사상 28번째로 영향력이 큰 가공 인물로 꼽는다.

미국의 경이적인 전시생산을 이끌어내고 영웅으로 불리던 수많은 로지들은 끝이 좋지 않았다. 전후 대량해고를 피할 수 없었던 탓이다. 적어도 300만명 이상의 여성 노동자들이 종전 후에 해고 당했다.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의 1944년 제대군인원호법(G.I. Bill) 제정이 없었다면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잃었을 게 확실하다. 리벳공 로지가 전쟁 중 미국 산업을 살렸다면 제대군인원호법은 종전후 미국 청년들과 미국을 살렸다.

제대군인원호법은 종전 후 혼란을 피하려는 안전장치였다. 전쟁이 끝나 한꺼번에 1,500만명의 장정이 돌아올 경우 취업대란, 실업난 등 각종 후유증을 막으려 미국은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 돈을 대줬다. 모두 1,040만 명의 참전용사가 이 법의 혜택을 받은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둔 분야가 제대군인의 대학 진학. 780만 명의 전역 장병이 학비를 걱정하지 않고 대학에서 로스쿨까지 다녔다. TV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부대원 대부분이 이 법의 지원 아래 대학에 진학하고 집을 샀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스승)로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는 명저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미국이 지식사회로 전환한 기반이 이 법에 있다고 분석했다. 정말 그랬다. 대학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평가 속에서도 법의 혜택을 받은 제대군인들은 탄탄한 중산층으로 자리 잡으며 1950~60년대 번영을 이끌었다. 소외계층인 흑인들이 대학 진학 기회를 얻어 백인사회와의 격차를 좁힌 것도 이 법의 영향이다. 요즘 전역병들은 학비의 절반 정도만 받는다고 하지만 선진국치고는 복지수준이 낮은 미국에서 이 법은 여전히 보석 같은 존재다.

제대군인원호법의 혜택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대학을 나와 결혼할 무렵에는 윌리엄 레빗 같은 건축업자들이 주도한 중저가 주택 붐이 일었다. 도심 외곽에 대지 150평, 건평 22평 주택 가격이 7,990달러로 당시 4인 가구 연평균소득(6,808달러)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 요컨데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미국은 여성들과 젊은이들이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사회의 힘을 짜냈던 것이다.

미국의 리벳공 로지와 제대군인원호법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누구보다 이를 잘 써먹은 사람이 바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 2009년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며 리벳공 로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특별한 포스터를 선보였다. 모델은 누구 봐도 미셀 오바마 여사. 문구도 다소 바뀌었다. ‘위 캔 두 잇(We Can Do It!)’에서 ‘예스, 위 캔(Yes, We Can)’으로. 경제 위기를 능히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2차대전 당시의 포스터를 패러디해서 강조한 것이다.





오마바 대통령 자신이 리벳공 로지와 제대군인원호법의 간접적 수혜자다. 케냐 출신 흑인 청년과 결혼한 딸이 낳은 흑인 손자를 키운 백인 외할아버지는 제대군인원호법 덕분에 대학을 마쳐 중산층으로 올라선 2차대전 참전용사다. 외할머니 역시 ‘리벳공 로지’ 출신. 2차대전 당시 항공기 제작 공장에서 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구 절벽에 봉착한 마당에 여성 인력 활용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건만 여성 인력 취업률은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최하위다. 취업률을 따지기에 앞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여성을 배려한 게 뭐 있다고 ‘여성 혐오범죄’가 일어나는가. 강남역 사고가 정신 나간 사람의 얘기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신안군의 섬에서 발생한 여교사 윤간 사건은 사회 전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국을 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것은 실용 정신이다. 무기 공장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썼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고 명령한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나. 집을 싸게 주나. 사회는 건강한가. 이 기사에 실린 포스터와 사진 중에서 우리들은 어느 그림에 관심을 보내고 있나. 상업화한 성의 찌꺼기가 범람하고 도덕이 무너진 시대에 ‘건강한 노동’과 ‘앞날을 터주는 국가’를 생각한다. ‘헬 조선’과 함께.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질문의 답, 즉 사진의 주인공은 노마 도허티 부인. 훗날 마릴린 먼로로 이름을 바꿨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도허티 부인이 알려진 계기도 미 육군 항공대에 소속된 민간인 사진 작가의 카메라 앵글에 잡히면서부터다.(미 공군은 독립된 군으로 재창설된 1947년까지는 미 육군 소속이었다).



미육군 항공대가 도허티 부인을 촬영한 이유도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사기 진작이었다. ‘일하는 게 여성의 애국’이던 시절 도허티 부인의 사진과 전쟁이 끝나고 섹스 심벌로서 ‘마릴린 먼로’(이 사진 촬영 당시는 26세)의 사진에는 미국 사회의 시각 변화도 담겨 있다. 환경과 세태에 따라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미국의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 변화가 바로 그 것이다. 동일 인물이 앳된 여성 노동자에서 섹스 어필의 상징으로 변하는 데는 불과 8년의 세월이 걸렸을 뿐이다.

** 소련의 스탈린은 1943년 말 열린 테헤란회담의 한 만찬장에서 “만약 미국산 무기가 없었다면 연합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라며 “미국의 전시 생산능력을 위해 건배하자”고 제의했었다. 스탈린까지 칭송했던 ‘미국의 전시생산능력’은 공짜로 나온 게 아니다. 미국의 참전이 확정된 1941년 말부터 승리가 확실해진 1945년 초까지 승용차 생산은 44대에 그쳤다. 모든 자동차회사와 부품회사가 전쟁물자를 만드는데 투입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부들에게 가꾸라고 채근했던 ‘승리의 텃밭(Victory Garden)’에서 나오는 채소가 전국 채소공급의 3분의 1을 차지한 적도 있다. 미국인들의 내핍과 근면 절약, 선택과 집중이 ‘전시생산능력’을 낳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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