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선에서 엘리트 관료 출신의 경제전문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녀 대통령을 꿈꿨던 게이코 후지모리(41)의 대권 도전을 또다시 좌절시켰다.
페루 선거관리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나흘간의 개표 끝에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77·사진)가 51.12%의 득표율로 49.88%를 얻은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4만1,000표(0.24%)에 불과했다.
쿠친스키 당선인은 발표 직후 취재진에게 “페루는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다”며 “다수의 페루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기차가 떠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페루인 모두를 태우고 싶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이 발언에 대해 선거로 분열된 페루 민심을 다독여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분석했다.
이번 승리로 남미에서 역대 최고령 대통령에 오르게 된 쿠친스키는 유대계 독일 이민자 출신이다. 세계은행에서 경제학자로 근무했으며 월가 금융기관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중앙은행 총재와 두 차례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며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의 쿠데타로 좌파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지난 1969년 미국으로 망명해 20여년간 주로 미 금융권에서 활동했다. 2000년 알레한드로 톨레도 정부 출범과 함께 정계에 복귀한 그는 2005년 8월 총리에 발탁되기도 했다. 페루 현지 언론들은 경제전문가로서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오랜 공직생활에도 부패사건에 엮이지 않은 청렴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쿠친스키의 앞날은 다른 남미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2010년 8.8%를 기록한 페루의 경제성장률은 글로벌 경기침체로 주력 수출품인 원유·구리·아연·금 등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2012년 6.0%, 2014년 2.4%로 급격히 둔화됐다. 이번 페루 대통령선거가 쿠친스키 대 후지모리의 중도우파 간 대결로 좁혀진 것도 오얀타 우말라 현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정권이 경기침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실망감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쿠친스키는 경기회복을 위해 재정적자를 편성,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실시하고 적극적인 감세정책 등을 펴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선거에서 패한 후지모리와도 정치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처지다. 자신이 소속된 ‘변화를 위한 페루인당(PKK)’의 의석 수가 전체 130석 가운데 18석에 불과해 후지모리가 대표로 있는 73석의 ‘민중권력당(FP)’의 지원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중도우파인 두 정당이 정치·경제적 성향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경기활성화 등 주요 정책을 두고 협력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상도 나온다.
한편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뒤를 이어 부녀 대통령을 노렸던 게이코 후지모리는 2011년 대선에 이어 결선투표에서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4월 치러진 1차 투표에서 후지모리는 40%의 지지율로 21%를 기록한 쿠친스키를 앞섰지만 결선투표에서 역전됐다. AP 등 외신들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10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저지른 부패와 범죄전력을 공격한 쿠친스키의 선거전략이 유효했다고 보도했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인권유린과 국고유용·부정선거 등의 혐의로 2007년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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