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해서’, ‘홧김에’, 그렇게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벌어지는 폭력과 사고가 연일 넘쳐난다. 폭발 직전의 화약고처럼 대한민국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최근 청주에서 50대 남성이 “반말한다”는 이유로 동갑내기 직장 동료를 폭행해 중태에 빠뜨렸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가깝지 않은 사이인데 반말을 해서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지난달 2일 새벽에는 대전의 한 아파트에서 10대 청소년이 같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있던 20대 여성을 벽돌로 내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대 청소년은 후배와 말다툼을 한 후 화가 난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지난 2월에는 서울의 한 떡볶이 가게 주인은 음식 맛을 타박하는 손님을 흉기로 33차례나 찔러 살해했고 4월에는 한 시민이 자신이 요구한 사건을 처리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관 4명에게 황산을 뿌려 구속됐다.
◇ ‘욱하면’ 사람 잡는다
최근 대한정신건강의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과반수가 분노조절이 잘 안 돼 노력이 필요한 상태로 나타났다. 특히 10명 중 1명은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고위험군에 속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포착됐다. 우리나라 충동조절장애 환자 수는 최근 2009년 3,720명에서 2013년 5,000여명으로 5년 사이 32.6%가 증가했다.
단순한 현상이나 우발적인 사고에 그치는 데서 더 나아가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발적으로 벌어진 폭력 범죄는 15만건으로, 전체 폭력 범죄의 40%에 이른다. 앞서 말한 사례뿐만 아니라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범죄’ 역시 약 70%가 분노 상태에서 저질러진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특히 더욱 심각한 것은 분노범죄가 정신질환자나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반인이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성인 절반 가량이 분노를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을 때 누가 가해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 ‘분노범죄’는 왜?
분노범죄는 대개 분노조절장애로 발생한다. 분노조절장애는 정신의학적으로 ‘충동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s)’의 일종이다. 일단 이러한 질병은 자신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이 고착화되면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가치나 욕구, 신념이라는 자기 보전의 감정이 거부당할 때, 외부 스트레스를 참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충동을 쉽게 조절하지 못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가 나타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심리학자 프랭크 미너스(Frank minirth) 박사는 분노에 대해 “분노는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될 때 폭발한다”고 말한다. 결국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열등감이 쌓였다가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다.
◇ 사회 심리적 안전망 갖추는 것이 중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적 성장을 이룬 나라 대한민국이 삶의 질은 하위권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 순위는 지난해 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에 그쳤다. 복지·노동시간 등 사회지표들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자살률 및 자살증가율에서는 OECD 회원국 가운데 꾸준히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유엔이 지난 3월 발표한 ‘2016년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인의 평균 행복지수(최저 0점, 최고 10점)는 5.835점으로, 조사 대상 157개국 가운데 58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개선되고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면 분노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또, 분노조절장애 역시 엄연히 정신 질환의 하나로 특별히 관리돼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치료 시스템ㆍ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대양 한국범죄심리학회장은 “삶이 팍팍하다 보니 쌓인 게 많고 이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상황에서 특별한 촉발 인자를 만나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 심리적 안전망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인경인턴기자 izzy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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