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점심을 먹다가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다. 친구 집에 있는 뚝배기의 뚜껑이 깨졌다. 친구의 안주인이 동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뚜껑 없는 뚝배기 필요한 분’을 찾았다. 동네 주민이 “마침 뚝배기가 깨져 뚜껑만 남았는데 잘됐네요.”라며 가져갔다. 친구는 공유경제의 사례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요즘 심각한 문제인 소비의 감소를 실감했다. 친구는 대기업 상무다. 대기업 상무 집에서 뚜껑이 없는 뚝배기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다면 우리나라 가정 10곳 중 9곳은 뚝배기에 웬만큼 결함이 생기더라도 새로 사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뚝배기를 새로 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뚝배기 공장은 재고를 쌓아둔 창고가 다 차기 전에 생산을 줄일 것이다. 생산이 감소하면 노동자의 월급봉투가 가벼워지고 소비는 더욱 위축될 것이다. 악순환이 계속돼 마침내 공장 가동이 멈추면 세상은 자급자족하는 원시사회로 돌아갈 것이다.
터무니없는 상상일 수도 있고 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 우리 경제를 보면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상황이 갈수록 확연해져 공장 가동이 멈추기 직전인 것 같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4분기 실질 국민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0.5% 성장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지난해 1·4분기 이후 가장 낮았다. 성장의 두 축인 수출과 내수가 한꺼번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수출은 1.1% 줄어 2014년 3·4분기 이후 최저치였다. 기업의 설비투자는 7.4% 줄었고 민간소비도 0.2% 감소했다. 성장률이 내려가고 수출과 내수가 위축되는 현상이 금융위기 이후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수요와 공급이 번갈아 우위를 나타내며 호황과 불황이 반복됐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호황은 사라지고 불황만 보인다.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공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수요는 역으로 급감할 것이다.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출산 고령화, 부의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 등 모든 현상은 수요 감소를 가리키고 있다. 가계부채와 국가부채가 급격히 늘어 이제는 당겨쓸 미래 수요마저 동났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수요가 한계에 이르면 자본주의도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의 숙명이다.
유권자의 표로 먹고사는 정치인의 후각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그들은 금융위기 이후 경제 흐름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보면 흉흉한 민심을 파고들 그 무언가를 최소한 말로는 준비했다. “이제는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 분배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소득 불평등이 지금처럼 심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종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좌파의 주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 발언이 우파 정당인 새누리당의 정진석 원내대표 입에서 나오다니 놀랍다.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한참 가 있을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대표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불평등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인의 사탕발림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는 진짜 분배를 논의해야 한다. 선진국은 분배를 얘기하고 실천에 옮긴 지 오래됐다. 미국에서는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기 위한 ‘15달러를 위한 투쟁(fight for $15)’이 한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기본소득도 스위스에서는 도입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고 핀란드는 내년 시범 시행을 예정할 정도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자본주의가 다른 방식으로 연명할지 자본주의가 사라지고 새로운 어떤 주의가 도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 그때까지 혼란을 최소화하고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 나가려면 모두가 더 내고 덜 받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hank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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