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대한민국 남성에게 이보다 더 고단한 단어가 있을까요?
새벽부터 심야까지 ‘이병 신!대!두!’를 외쳐댔던 지긋지긋했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이병신’이 일만 하는 ‘일병신’과 군대식 사고에 매몰된 ‘상병신’을 거쳤습니다.
그 세월 동안 쌓인 한숨의 무게는 얼마일지 궁금합니다.
1995년 가을, 스물한 살 청년 신대두는 육군 제2 훈련소로 입대했습니다.
내게 논산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장이었습니다.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내며, 마음에 패인 흉터가 깊기 때문일 겁니다.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 서둘러 논산을 떠나며, 애굽(이집트)을 탈출하는 모세의 마음을 상상할 정도였으니까요.(성경의 ‘출애굽기’ ==> ‘이집트 탈출기’)
그런데 군 입대 때문에, 떠난 지 불과 스무 달 만에 다시 논산으로 돌아온 겁니다.
처음엔 4주만 버티면 다시 떠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훈련병 기간 사달이 났습니다. 참고로 ‘사달’은 사고나 탈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로 보통 사용되는 ‘사단’은 틀린 말입니다(이런~제가 또 아는 척을;;)
이런 저런 사람 나오라고 하길래 나가고, 남으라고 하니 남았습니다.
뒤늦게 훈련소 분대장(일명 ‘조교’)을 선발하는 과정이란 걸 깨달았지만, 어쨌거나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26개월을 논산에서 복역했습니다.
휴가 자주 나오고 훈련병들 얼차려 주니 좋지 않았냐구요?
알량한 휴가 안 줘도 좋으니, 전투화 좀 벗고 쉬고 싶었습니다.
쉴 시간도 없이 도끼눈 뜨고 감시하는 게 뭐가 좋겠습니까?
즐겁고 행복했던 군 생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1995년 육군 제2훈련소(논산훈련소)는 1만명 넘는 인원이 복무하는 큰 부대였습니다.
영내에 교육시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외부 교육장이 많았습니다.
교장들은 병영에서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속보로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곳이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논산훈련소는 1997년 초까지 다른 부대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겨울엔 새벽 6시, 봄부터 가을까지는 5시30분에 기상하니, 모자란 새벽잠만큼 전투력은 시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원거리 교장으로, 영점사격장과 각개전투 숙영장, 수류탄 투척장이 기억납니다.
그 중 수류탄 교장은 가장 먼 곳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한창 때 청년들이라도, 소총을 매고 한 시간 이십 분을 걸어가면 진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훈련병들이 강의장에서 이론교육을 받는 동안, 조교들은 실습 준비를 하기 위해 소대별로 흩어집니다.
그리고 교보재(교육보조재료)를 깔아놓고 빈대떡 아주머니를 찾았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른 파마머리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요리 조리 샛길을 잽싸게 오가시며, 교육장을 누비셨습니다.
아주머니는 빈대떡 한 장에 1,000원씩 받으셨습니다.
말주변이 좋거나 잘생긴 녀석이 사면, 세 장에 한 장을 덤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름만 빈대떡이지, 우리가 먹었던 건 김치부침개였습니다.
녹두를 갈아 고사리와 숙주, 고기를 넣고 부친 고소한 빈대떡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밀가루 반죽 부침이었지만, 따끈하고 매콤해 별미였습니다.
군대에서는 맛볼 수 없는 푸근하고 자유로운 맛에, 우리는 50일에 한 번 오는 수류탄 교육일을 명절을 맞이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곤 했습니다.
왕복 세 시간을 걷는 듯 뛰어야 했던, 논산군 연무읍 황화면의 수류탄 교장 가는 날을.
1997년 늦은 가을, 수류탄 훈련일이었습니다.
빈대떡 먹을 생각에 아침도 거르고 왔는데,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장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주린 배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배로라도 허기를 채우겠다며 걸음을 옮기다가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아주머니? 빈대떡 먹으려고 한참 찾았잖아요. 아침도 굶고 왔어요”
아주머니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이고 이걸 어쩐댜, 오늘은 우리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빈대떡을 안 부쳤는디...”
“괜찮아요. 얼른 나으셔야 할 텐데요.”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를 잇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다음 달에 제대해요. 아주머니 빈대떡 기다리다 보니 군 생활이 후다닥 지나갔네요. 건강하시구요. 충성!”
그렇게 아주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교육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말년병장은 실습훈련에 참여하지 않고 빈 교장을 지킵니다.
지난 25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군 생활이 끝나면 천국이 찾아올 거라고 기대했는데...
“군인 아저씨, 배고프지? 이거라도 먹어. 밀가루가 딱 떨어졌지 뭐래.”
아주머니가 건네신 종이봉투를 엽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찐감자입니다.
“시장할 텐데 어여 들어. 제대 축하혀.”
고마움에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집니다.
“고마워요, 아줌마.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이거 얼마를 드려야죠?”
손사래를 치며 후다닥 달아나시는 아주머니.
“제대 선물이여. 몸 건강히 잘 지냐. 이 힘든 군 생활도 마쳤는디, 뭔들 못 하겄어?”
갑자기 뭔지 모를 용기가 샘솟는 듯합니다.
껍질을 깐 감자를 한 입 배어 뭅니다.
짭짤하고 담백한 맛이 참 정겹습니다.
그래, 뭔들 못 하겠어... 이 지옥 같은 군 생활도 견뎌냈는데!
빈대떡처럼 어원설이 많은 음식도 드물 겁니다.
그만큼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도 부담 없이 정겹게 찾을 수 있었던 음식이란 방증 같습니다.
날씬한 지갑을 들고 빈대떡집을 찾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정겨운 노래 한 구절이 귓가를 스칩니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아, 배고파.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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