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타잔’이라는 외화를 즐겨 봤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옮겨 다니며 정글을 누비는 타잔의 움직임에는 아주 단순하지만 중요한 법칙이 있다. 앞의 넝쿨을 잡을 때 뒤에 잡고 있던 넝쿨을 놓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존 대시와 드론 택배, 구글 홈서비스 등 지난 수십년간 변화보다 더 큰 생활의 변화가 1~2년 사이 일어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빅무브먼트’ 시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그간 진행된 변화를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계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변화는 빅데이터·로보어드바이저·핀테크 등 금융 분야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법이나 규정은 늘 현상을 뒤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규정의 ‘후행성’이다. 특히 한국의 금융사업자들은 규정에 없는 혁신적 금융서비스를 고객에게 한발 앞서 제공하는 게 불가능하다. 미리 법규에 열거해놓은 업무만 가능한 체계 탓이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확고한 기본과 원칙은 지키되 창의성 발휘와 혁신이 가능한 환경이 필요하다. 어쩌면 ‘창조적 파괴’ 수준의 규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제도 개선’의 문제가 아닌, ‘의식 개조’의 문제다. 특히 자율과 창의를 통한 혁신이 중요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은 그 필요성이 더 크다. 금융선진국들이 일찍이 규정중심 규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원칙중심 규제로 전환을 시도한 이유다.
콜럼버스도 ‘지구는 둥글다.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는 단 하나의 원칙에 충실했다. 그래서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서쪽으로만 나아갔다. 만약 콜럼버스가 망망대해에서 일어날 모든 변수에 대응할 매뉴얼에만 집착했다면, 신대륙은커녕 영원히 스페인 팔로스항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기술변화 속에서 정글보다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생존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도 타잔처럼 ‘규정중심’이라는 나무 넝쿨을 놓고 ‘원칙중심’이라는 넝쿨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김진억 금융투자협회 법무지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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