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7월22일, 미국인들이 휘발유 배급 쿠폰을 받았다. 시행 지역은 석유가 나지 않는 동부 17개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주도한 휘발유 배급제가 시행된 순간이다.* 휘발유 배급제의 이유는 간단했다. 전시 물자 절약. 비행기와 전함, 탱크를 움직이거나 동맹국에 기름을 보내기 위한 강제적 소비절약책이 휘발유 배급제였다.
정작 미국 시민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 산유국’**에서 배급제를 시행한다는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휘발유를 구하러 나온 일부 시민들은 유조차를 뒤집는 소동까지 일으켰다. 플로리다주는 ‘관광객으로 먹고 사는 처지에 배급제가 전면 시행되면 경제가 무너진다’며 예외를 요청하고 나섰다. 일부 지질학자들은 미국의 원유 생산이 충분하다는 보고서를 내밀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국민을 차근 차근 설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미국 정부는 종합적인 대국민 설득 작업에 나섰다. 휘발유는 당장 부족하지 않지만 일본의 말레이반도 점령으로 천연고무 반입이 끊겼다는 점을 주로 부각시켰다. 국민들이 마음껏 차량을 운행하면 타이어가 많이 소모되고 군용차량에 쓸 타이어를 제작할 고무가 부족해진다는 논리였다.*** 고무를 앞세운 정부의 설득은 통했다. 1942년12월부터는 휘발유 배급제 적용 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현실적으로 개인 소유 차량이 없으면 바깥 나들이가 어려운 서부의 반발은 지역별 특성에 따라 배급량을 유연하게 정하는 차등정책으로 넘을 수 있었다. 휘발유 배급제 전국 확산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전시통제위원회의 역할도 컸다. 월가의 백만장자이며 주식 투자로 유명한 버나드 바루크는 위원장을 맡아 의원만 100명을 만나는 노력으로 반대 세력을 하나 하나 설득해 나갔다.***
전국적인 배급제는 등급제도와 함께 시행됐다. 오토바이 사용자들은 ‘B 등급’으로 지정돼 일주일에 2갤런(약 7.57ℓ)을 살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A 등급’으로 분류돼 일주일에 4갤런(약 15.14ℓ)씩 휘발유를 받았다. 우편 배달부나 무기공장 책임자 등 전쟁 수행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C 등급’을 받아 8갤런(30.28ℓ)까지, 상업용 트럭 운전기사는 5갤런(18.92ℓ)을 각각 할당받았다. 의회 의원(X 등급)은 제한이 없었다.
차별적인 등급제에도 불만은 거의 없었다. 종합적인 대책을 함께 시행한 덕이다. 배급제와 함께 주유소 영업시간 제한, 적정 실내온도 유지 캠페인, 석유 냉난방 시설 가동 중단 혹은 석탄 연료로의 대체, 대중교통수단 이용 장려 등 요즘 세계 각국이 시행하는 유류 절약운동이 대부분 이때 나왔다. 동부의 기업들과 중서부의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 사이에서는 ‘차 함께 타기’ 운동이 일어났다. ‘카풀(car pool)’이라는 단어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암시장도 형성됐다. 미국 정부는 이를 바로 단속하기보다 간접적인 수단을 동원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제작된 수많은 전쟁 포스터의 하나인 아래의 포스터를 보자. 불법으로 휘발유를 사는 사람과 미군 병사의 얼굴, 그리고 ‘당신의 행위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으로 구성된 이 포스터가 전하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당신이 몰래 사 쓰는 그 기름은 우리 병사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는 전쟁에 먼저 투입돼어야 하는 전략 물자다’라는 압박이 담겼다.
미국은 휘발유 배급제와 관련된 정책 뿐 아니라 수요 전체도 눌렀다. 1942년부터 1945년 상반기까지 민간용 승용차의 생산을 전면 금지하며 전쟁 물자 생산에 온 힘을 쏟았다.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한 덕에 군수 공장으로 탈바꿈한 각종 공장에서는 무수한 무기를 쏟아냈다. 막대한 물량의 미국산 무기는 미군과 연합국에 보급돼 미국산 석유로 움직이며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끌었다.
미국은 연합국이 사용한 약 70억 배럴에 이르는 석유 가운데 60억 배럴을 댔다. 정부의 설득과 휘발유 배급제로 상징되는 국민의 고통 분담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미국의 물자와 석유가 아무리 풍부했어도 정부가 단계적으로 국민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못구했다면 전시 배급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휘발유 배급제 시행으로부터 74년 시차를 넘어 지금 여기의 우리를 본다. 답답하다. 자원도 돈도 없는 나라가 국민의 동의 없이 국가대사를 결정하고 국민에게 따르라고 강권하며 훈계하는 현실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휘발유 배급제가 처음 시행된 시기는 이보다 108일 전인 5월15일. 동부 해안 지역 주민들이 식권처럼 생긴 카드를 지급받았다. 주유소에서 휘발유 할당량을 구매한 뒤 카드에 구멍을 내는 시범기간을 거쳐 미국은 본격 쿠폰제로 넘어갔다.
**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다. 2위는 멕시코와 소련이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가운데 미국은 부동의 1위였다. 1856년 일단의 모험 사업가들이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시추탑 방식으로 석유 채굴에 성공한 이래 미국인들은 석유를 마음껏 썼다. 개발 초기에 뿜어져 나온 원유에서 미국인들은 램프용 등유만 뽑아 쓰고 ‘불필요한 부산물’로 취급받은 휘발유는 내버렸다. 20세기 들어서도 미국에서 연이어 초대형 유전(giant급 유전: 록 허드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딘이 출연한 1956년작 영화 ‘자이언트’의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이 연이어 발견돼 미국인들은 석유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익숙한 상태였다.
***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버나드 바루크(Bernard M. Baruch 1870~1965)는 기억할만한 인물이다. 95세 천수를 누린 그는 종종 ‘장막 뒤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우드로 윌슨부터 존 F 케네디까지 대통령 8명의 경제보좌관을 무려 40년 동안 지냈기 때문이다. 1·2차 대전에서는 전시산업위원장을 맡아 생산과 가격을 통제하고 세금원천징수제도, 고무와 주석 등 전략물자 비축제도를 도입했다. 종전 후 국제연합(UN) 원자력에너지위원회 미국대표로 일할 때 제시한 ‘미국이 세계의 핵을 관리, 통제한다’는 이른바 ‘바루크 플랜’은 오늘날까지 미국 핵정책의 근간으로 내려오고 있다. ‘동물농장’, ‘1984년’을 지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만들어낸 ‘냉전(Cold War)’이란 단어도 바루크에 의해 퍼졌다.
영국 정치인 윈스턴 처칠과 주식 투자를 둘러싼 일화도 유명하다. 처칠은 영국 재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1929년 중반 뉴욕증시에 투자했으나 손대는 종목마다 주가가 떨어졌다. 처칠이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한 미국인 친구가 원금 이상의 잔액이 남은 처칠 명의의 주식계좌통장을 건낸 것이다. 처칠을 구해준 친구가 바로 바루크였다. 바루크는 처칠이 판 주식은 사고, 사들인 주식은 파는 정반대의 매매로 수익을 올렸다. 처칠이 끝까지 함구했던 주식투자 에피소드는 바루크의 회고록에서 밝혀졌다. 1900년대 초부터 죽을 때까지 월가의 유명한 큰 손이었던 바루크는 남들과 제휴하지 않고 혼자서만 움직여 ‘월가의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9년 주가 대폭락의 와중에서도 손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큰 손으로도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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