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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만나 뭐 먹었나”…부부간 감시 조장하는 김영란법

[김영란법 이것이 문제다] (하) 문제많은 ‘배우자 신고’ 조항

직무 관련성 모호…예상못한 신고 부작용 속출할 듯

“보안법만 있는 배우자 불고지죄…연좌제 금지 위배”

# 중앙부처 공무원 김모씨는 최근 남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박모씨 등 같은 업계 친구들과 만나 술을 먹은 일이 있었다. 이 자리는 박씨가 술값을 냈는데 이 친구가 다니는 회사가 김씨가 속한 부처와 계약관계가 진행 중인 곳이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김영란법의 ‘배우자의 금품 수수 금지 규정 위반’이라며 신고했다.

공무원인 김씨는 박씨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남편이 박씨와 술을 먹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공무원 김씨와 박씨가 직무 관련성이 높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결국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직장 내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조사가 끝난 뒤 김씨는 남편에게 매일 누구와 만나는지 얘기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간섭받기 싫다며 거부했다. 전전긍긍하던 김씨는 남편 몰래 통화기록을 뒤지기도 했다. 이 사실을 남편이 알아채면서 심한 말다툼이 일었고 지금도 부부관계가 좋지 않다.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공직비리를 뿌리 뽑는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일부 조항의 위헌성·모호함 등으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배우자 조항’이다.

법은 공직자의 배우자가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금품(식사, 선물, 각종 서비스, 후원 등) 을 받으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직자는 배우자가 금품을 받은 사실을 알면 즉시 신고해야 하며 신고 의무를 어길 때 형사처벌 또는 과태료 처분을 내리도록 했다. 이 조항은 양심의 자유, 자기책임 원칙, 연좌제 금지 등의 측면에서 헌법 위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배우자 의심·감시하라는 법=‘배우자 조항’은 위헌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앞서 든 가상사례처럼 의심과 감시가 일상화된 가정을 양산할 수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 김씨의 예처럼 누군가의 오해로 배우자 금품 수수 관련 수사나 조사를 받는 일이 생기면 다음부터는 배우자 관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오늘 누구를 만나 무엇을 먹고 뭘 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런 사례가 한두 번 나오기 시작하면 별문제가 없었던 공직자 가정에도 의심하고 감시하는 풍토가 퍼질 수 있다. 더욱이 김영란법은 일반인이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을 해코지하기 위해 묻지마 식 신고를 하는 등 악용 가능성이 많아 이런 우려가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세동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김영란법 관련 배우자 조항에 대해 걱정하고 문의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며 “배우자 조항의 경우 직무 관련성이 있는 거래는 다 처벌 가능해 부부가 서로 감시하는 등 여러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배우자 불고지죄는 현재 국가보안법에만 있다.

◇모호한 직무 관련성 규정=김영란법에서 대표적인 모호한 규정으로 꼽히는 직무 관련성은 배우자 조항에서도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모 국립대 사회학과 교수의 배우자 D씨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여자 동창 모임이 있다고 치자. 식사비는 동창 E씨가 냈는데 최근 E씨의 딸이 이 국립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E씨 딸은 경영학과로 D씨 남편의 학과와는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교수는 E씨가 같은 학교에 있다는 것만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직무 관련성이 인정돼 처벌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의 경우 이 같은 직무 관련성은 더 넓다.

김세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조사·수사기관에서 직무 관련성을 폭넓게 볼 가능성이 높아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최근 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모임에 나가면 배우자의 직업이 무엇인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마저 나온다고 한다.

◇돈 준 민간인만 처벌하고 받은 공직자는 처벌 못하나=배우자 조항은 금품을 건넨 공여자만 처벌하는 규정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크다. 배우자 조항에 따르면 공여자는 직무관련성이 있는 공직자의 배우자에게 금품을 건넨 사실만 있으면 처벌받는다. 하지만 해당 공직자를 처벌하려면 그가 배우자의 금품 수수 사실을 ‘알았다’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 그런데 공직자는 으레 몰랐다고 주장할 것이고 배우자가 금품 수수 사실을 알렸다는 문자메시지 등 뚜렷한 물증이 없는 한 이를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금품을 받은 당사자인 배우자는 김영란법상 처벌 대상이 애초에 아니다. 결국 금품은 오갔는데 금품을 건넨 측만 처벌받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염동신 세종 변호사는 “뇌물 수사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범죄 사실의 ‘인식’을 입증하기는 굉장히 까다롭다”며 “이런 점 때문에 배우자 조항의 경우 공직 비리를 척결한다는 법 취지와 달리 돈을 건넨 민간인만 처벌받는 사례가 다수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평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배우자에게 신고 의무까지 줘가며 공직자를 규제하겠다는 것은 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는 법 만능주의, 과잉 입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영란법은 모든 공직자를 강하게 규제하겠다는 건데 사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고위공직자 비리”라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등으로 대형 부패비리를 뿌리 뽑는 데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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