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 장로병원에 근무하는 한 직원의 PC 화면에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이터를 복구하고 싶으면 40비트코인(1만7,000달러)을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병원 전산망에 암호화된 악성 바이러스 코드를 심어 내부 시스템을 마비시킨 해커들의 소행이었다. 병원 측이 고심 끝에 선택한 해결책은 해커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것이었다. 환자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만큼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복구하자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커들은 꼬리가 달려 있는 현금다발이 아니라 거액의 비트코인을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2009년 등장한 비트코인(Bitcoin)은 세계에서 이용자만 1,000만명을 웃도는 가상화폐다. 전문 거래소를 통하면 달러·엔 등 실물 화폐와 자유롭게 교환하고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거래나 결제까지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거래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해킹과 보이스피싱, 자금 세탁 등 범죄에 악용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나 골치를 썩이고 있다.
최근에는 파일이나 데이터에 암호를 걸어 금전을 요구하는 ‘랜섬웨어’에 비트코인을 이용하는 사이버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소중한 데이터를 인질로 잡아 협박 메시지를 보내고 몸값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간 일반인의 호주머니를 털어왔던 해커들이 대담해지면서 점차 기업들을 겨냥한 범죄에 열을 올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 바람에 비트코인 시세도 덩달아 오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커들이 먹튀 행위를 일삼는데도 평판을 관리하느라 약속을 잘 지킨다는 얘기마저 나올 정도다.
얼마 전 인터파크의 고객정보를 빼낸 해커들이 30억원어치의 비트코인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해외에서만 판치던 비트코인 범죄가 급기야 우리 기업들에도 발등의 불로 떨어진 셈이다. 비트코인의 악용을 막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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