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200톤급 범선 ‘히스파니올라 호’에 오른 보물섬 원정대가 된다. 배 위에서 펼쳐지는 꿈과 희망, 욕망과 갈등까지. 숨 막히는 긴장에 몸을 싣고 따라가다 보면 한동안 잊고 지낸 저마다의 ‘소중한 무엇’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좇아온다. 너무 일찍 현실에 발을 내디딘, 그러나 여전히 꿈꾸고 싶은 어른을 위한 연극 ‘보물섬’이다.
보물섬은 예술의전당이 올해 기획 공연으로 준비한 가족극으로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열두 살 소년 짐 호킨스가 자신의 여인숙에 찾아온 늙은 선장 빌리 본즈를 통해 보물 지도를 손에 쥐면서 벌어지는 모험극이다. 의사와 선장·선주, 그리고 선원으로 가장한 해적 등 각자의 꿈 혹은 욕망을 품고 히스파니올라 호에 오른 사람들 속에서 짐은 꿈 너머의 현실을 마주하며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원작의 핵심 스토리와 개성을 적절하게 버무린 연출은 단연 돋보인다. 보물섬은 2년간 34개 에피소드로 연재된 소설이다. 원작의 전체 장면을 재연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4시간 30분이었다. 연극은 이야기 순서를 바꾸고 배우들이 중간중간 내레이션으로 극의 전개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공연 시간을 110분으로 압축했다. 특히 이 과정에 9명의 배우는 대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역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캐스팅돼 각색에 참여했다.
익숙한 스토리에 얹은 감각적인 양념도 맛깔스러웠다. 4인조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배우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때론 흥겨운, 때론 서글픈 극의 분위기를 북돋운다. ‘우리는 모두 꿈을 좇아 바다를 건너왔지만, 아무것도 아닌 꿈(중략) 바람은 계속 불어올 테고 이 바다 위에 넌 혼자가 아냐.’ 짐과 해적 존 실버가 함께 부르는 ‘바람은 불어올 테고’는 극이 끝나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부제가 ‘맹랑한 꼬맹이와 나사 빠진 형님들의 모험’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작품 곳곳에 심어놓은 B급 유머도 극의 감칠맛을 내는 데 일조한다.
무모한 모험보단 안전한 현실을 추구하고, 돈·명예·성공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되어줄 작품이다. 110분의 항해가 끝나면 이내 사라질 것들이라 해도 말이다. 어린이에 초점을 둔 기존의 가족극과 달리 오랜만에 어른들도 빠져들어 즐길 수 있을 작품이다. 8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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