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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만든 결혼 시리즈





중세가 막을 내리던 15세기 말, 연이은 정략 결혼 4건이 유럽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가나 최상류층의 결혼은 으레 정략적으로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이 시기의 국혼만큼 역사에 흔적을 남긴 혼인은 없다. 무엇보다 관심을 끌었던 여성은 부르고뉴의 마리(Mary of Burgundy).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대공녀였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한 대공녀를 잡아라>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서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제후국. 프랑스 왕실의 방계였지만 중세 초 사라진 중프랑크 왕국을 복원한다며 프랑스와 맞섰다. 잔다르크를 잡아 영국에 넘기고 처형시킨 것도 부르고뉴다. 당시 유럽 최고의 상공업 지대였던 플랑드르 지역에서 나오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왕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르고뉴를 지배하던 ‘무모공 샤를’의 궁전에는 중매쟁이가 들끓었다.

샤를의 외동딸 혼인만 성사되면 부유한 부르고뉴를 통째로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마리의 다섯 살 때 첫 혼담이 들어왔다. 떠오르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자(다음 혼인의 대상이 바로 이 사람이다)를 비롯해 프랑스와 독일 각지의 제후들이 보낸 매파가 부르고뉴로 몰려들었다. 1477년 마리의 주가는 더욱 높아졌다. 샤를 공이 스위스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해 부르고뉴의 상속녀가 아니라 주인이 된 마리의 당시 나이가 20세. 프랑스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프랑스왕 루이 11세는 마리보다 13세 어린 아들과 약혼하자고 졸랐다. 마리는 프랑스의 구애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를 복수의 대상으로 여겼다. 아버지 샤를 공이 루이 11세의 부추김을 받은 스위스와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이다. 마리는 우선 부르고뉴를 지키기 위해 귀족·상공인들에게 충성과 복종 맹세를 받았다. 상공인들은 그 대가로 자치권을 얻었다.(지역자치권을 규정한 마리의 ‘대특권 조항’은 훗날 네덜란드 독립으로 이어졌다.)

마리는 배우자 선택에서도 군사적 보호막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삼았다. 최종 낙점을 받은 인물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선출직 황제에 오른 프리드릭 3세의 아들 막시밀리언. 마리보다 두 살 아래였다. 둘은 1478년8월19일 겐트(오늘날 벨기에 도시)에서 백년 가약을 맺었다.

플랑드르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마리와 독일어를 쓰는 막시밀리언은 라틴어로 간신히 소통하는 정도였으나 바로 사랑에 빠졌다. 아이도 둘 낳고 행복하게 살던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마를 좋아하던 마리가 왜가리 사냥에서 낙마해 결혼 4년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상심한 막시밀리언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전쟁과 정치로 달래, 아버지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올랐다. 마리의 재산이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최초로 혼담을 넣었던 아리곤의 왕자는 다른 공주와…>

어린 마리에게 최초로 혼담을 꺼냈던 아라곤 왕국은 마리보다 빨리 왕자를 결혼시켰다. 아라곤 왕국의 국혼은 뜻밖의 횡재였다. 마리보다 다섯살 많았던 페르디난도 왕자에게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가 결혼해 달라고 먼저 사람을 보내온 것. 마리보다 다섯살 많았던 페르디난도는 당시 17세, 이사벨 공주는 18세였다. 둘은 1469년, 카스티야 중북부 바야돌리드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남 몰래 결혼한 이유가 있다. 이사벨은 이복 오빠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명령한 포르투갈의 40대 홀아비 국왕과의 혼인을 거절하고 궁전을 탈출한 상태였다. 아버지인 후안 2세를 세 살에 여의고 감시와 견제 속에서 살다 궁전까지 탈출한 이사벨은 페르디난도에게 구원 겸 청혼편지를 보냈다. 페르디난도는 변장을 하고 카스티야로 잠입해 마침내 식을 올렸던 것이다.

극적인 결혼에는 계산이 깔렸었다. 유아기에 정혼해 3년 만에 파혼한 게 인연의 전부였던 두 사람은 이해득실을 따졌다.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성장을 위해 아라곤과의 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페르디난도의 아라곤 왕국 역시 카스티아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마당에 왕위계승권 서열 1위인 이사벨을 놓칠 수 없었다. 비밀결혼 직후 이사벨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 당했으나 이복 오빠가 사망한 1674년 왕위에 올랐다.

1679년에는 페르디난도 역시 아라곤의 왕위를 물려받아 두 사람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공동군주에 올랐다. 시간이 흐르며 두 왕국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상징으로 등장한 국명이 바로 ‘에스파냐’(스페인)다. 둘의 결혼이 없었다면 이사벨은 여왕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사벨 여왕에게 후원받은 콜럼버스의 항해와 신대륙 발견 역시 다른 국가의 다른 탐험가의 몫이 됐을지도 모른다.

둘의 결혼은 세계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큰 영향은 세계적 제국의 출현. 호전적 내륙국이던 카스티야와 해양국가인 아라곤의 결합은 콜럼버스의 항해 뿐 아니라 남미 정복으로 이어졌다. 금슬이 나쁘지 않았는지 두 사람이 낳은 아이 일곱 명 중 성년까지 살아남은 다섯 명의 후손은 16·17세기 유럽 왕가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사벨과 페르디난도의 셋째 딸은 또 다른 ‘세기의 결혼’의 주인공이 됐다.

<마리의 아들과 아라곤 왕자의 딸, 거대제국을 이루다>

이사벨과 페르디난도는 공동왕국을 잘 꾸려나갔으나 1503년 위기가 찾아왔다. 이사벨 여왕의 사망으로 카스티야의 통치권 논란과 분열 조짐까지 보였다. 에스파냐의 위기를 넘기게 해준 것도 역시 결혼이었다. 주인공은 이사벨과 페르디난도의 셋째 딸 후아나 공주. 17세인 1496년 합스부르크의 필리프 대공과 결혼했다. 결혼 뒤에 오빠와 언니가 잇따라 사망하는 통에 후아나는 1500년 카스티야의 후계자로 정해졌다.



후아나의 신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미남공’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인물이 좋았던 남편 필리프에게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필리프는 수많은 애인을 감추기는커녕 대놓고 과시해 후아나는 상처를 입었다. 남편의 바람기로 인한 분노와 질투가 얼마나 강했는지 후아나는 정신질환까지 앓았다. ‘미친 후아나’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어머니 이사벨 여왕이 사망(1504년)한 뒤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여왕에 즉위한 지 2년 만에 남편 필리프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후아나는 실의에 빠져 지냈다. 남편의 시신 곁에 머물며 국정도 아버지인 페르디난도 2세에게 도맡겼다. 자연스럽게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은 단일 군주 밑에서 한 나라로 합쳐졌다. 후아나는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국정 운영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후아나의 아들이 국왕 수업을 받았다.

1516년 페르디난도 2세가 사망했을 때, 미친 후아나의 아들 카를(당시 16세)은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외할아버지의 아라곤과 외할머니의 카스티야, 친할아버지(막시밀리언 1세)의 오스트리아와 친할머니 마리가 남긴 브르고뉴까지 모든 땅이 카를 한 사람에게 상속됐다. 그는 카를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외할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가 전쟁으로 확보한 이탈리아 중남부지역까지 카를 5세가 통치하는 에스파냐의 깃발이 휘날렸다. 로마제국 이후 사상 최대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한 여인을 처남과 매부가 승계한 프랑스의 정략>

연이은 정략 결혼으로 덩치를 불린 에스파냐는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모든 나라가 에스파냐의 눈치를 살폈다. 단 한 나라는 예외였다. 유럽 중부의 기름진 평야를 차지한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발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무기도 역시 정략결혼이었다. 프랑스의 정략 결혼은 약탈혼의 성격도 강했다. 신부를 무력으로 탈취했으니까.

프랑스가 빼앗은 신부는 브테타뉴 공국의 안느. 형식적으로만 프랑스 왕국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을 뿐, 사실상의 독립국가였다. 브레타뉴의 공작 프란시스 2세가 사망한 1488년, 프랑스는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브레타뉴 공국의 상속자인 안느가 홀아비인 막시말리언 1세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막시말리언은 아내인 부르고뉴의 마리를 잃은 지 6년이 지난 홀아비였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돼 절정의 군사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막시밀리언 1세가 부유한 브레타뉴까지 결혼을 통해 손에 얻는다면 여러 방면에서 협공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더욱이 샤를 8세는 막시밀리언1세와 구원이라면 구원도 있었다. 비록 기억 못하는 어린 시절이지만 13세 연상의 부르고뉴의 마리에게 청혼을 거절 당한 프랑스의 코흘리개 왕자가 바로 샤를 8세였다.

샤를 8세는 안느에게 청혼했으나 거절 당하자 군대 4만명을 동원해 브레타뉴로 쳐들어갔다. 결국 안느는 무릎을 꿇고 샤를 8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1491년 결혼 당시 샤를 8세는 21세, 안느는 14세였다. 둘은 금실이 나쁘지 않았는지 아이 4명을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에 죽었다. 샤를 8세가 결혼 7년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프랑스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브레타뉴의 소유권은 여전히 안느에게 있었던 탓이다.

결국 샤를 8세를 승계한 루이 12세는 단안을 내렸다. 미망인 안느를 접수하기로. 그러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루이 12세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루이 12세의 아내는 샤를 8세의 누나였다.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처남 매부지간이었던 것이다. 루이 12세는 14세에 결혼해 22년을 함께 살았던 아내이자 선왕의 누이와 이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을 졸랐다. 결국 조강지처와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정을 얻어낸 루리 12세는 처남댁과 1499년 결혼하고 말았다. 루이 12세는 36세, 안느는 22세였다.

처남과 매부 사이를 오가며 두 번에 걸쳐 프랑스 왕비가 된 안느는 딸만 둘 낳았다. 결국 루이 12세의 왕권도 사위가 이어받았다. 안느와 루이 12세 사이의 큰딸 클로드와 사위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나 훗날 앙리 2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브레타뉴의 귀속권도 이때부터 프랑스에 완전히 들어갔다.

<4번의 결혼, 근대 세계를 열다>

마리와 막시밀리안, 이사벨과 페르디난도, 미남공 필리프와 미친 후아나, 그리고 브레타뉴의 안느를 돌아가며 아내로 맞이했던 프랑스의 처남과 매형…. 이들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애정사와 왕실 간 정략결혼에 머물지 않고 근대 세계를 열었다. 유럽만의 독자적인 문화의 시발도 이사벨과 페르디난도의 결혼으로부터 싹텄다. 결혼 23년 뒤 두 사람의 공동국왕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레콘키스타’(재정복)로 불리는 이슬람세력의 축출 직후 3개월 만에 전격 단행된 ‘알함브라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더 뿔뿔이 흩어졌다. 유럽 각지에 공동체(게토)를 세워 연명한 끝에 종국에는 세계를 쥐고 흔드는 국제적 자본가로 성장한 것도 이사벨과 페르디난도의 비밀 결혼, 그 연장선상에 있다. 두 사람의 후손들은 유럽을 집어 삼키려던 오스만 투르크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정략 결혼으로 형성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가장 큰 영향은 서구가 주도하는 근대의 틀을 짰다는 점이다. 신대륙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의 개막, 글로벌 무역이 이 시기부터 본격화했다. 지구촌의 문물을 지배하는 것은 아직도 서양이라는 점에서 15세기말 정략결혼 시리즈는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당시 프랑스 국왕들은 약 100년 이상을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 전쟁을 펼쳤다. 단일 국가로서 프랑스의 정체성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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