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병자.’ 19세기 초반까지 독일 지역은 이렇게 불렸다. 무엇보다 극심한 분열로 한 목소리를 못 냈다. 15세기 무렵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한때 330여개의 제후국과 백작령, 도시국가가 저마다 자치권을 누렸다. 강변마다 성채가 유난히 많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이야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자원이지만 독일 각지에 세워진 성채는 행인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일종의 세관이며 검문소였다. 19세기 초까지 독일은 35개 제후국과 4개 자유도시가 제각각 통행료와 관세를 거뒀다.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창시자 격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독일의 상황을 이렇게 한탄했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물건을 내가려면 10가지 관세 규정을 연구하고 세금과 통행세를 10차례나 물어야 한다. 팔다리가 꽁꽁 묶였는데 어떻게 피가 돌 수 있는가!” 독일은 어떻게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이뤄냈을까. 무엇이 독일로 하여금 ‘아리안 민족의 순수한 핏줄’을 강조하게 만들고 두 차례 세계대전의 길로 이끌었을까.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독일인이 그리스 로마 위주의 서구 문명에 뒤늦게 섞이고 나름대로 혈통적 순수성을 유지하게 만든 전투다. 민족적 자긍심도 물씬 배어있다.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부터 ‘독일의 시성(詩聖)’이라는 하인리히 하이네까지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를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여겼다.
도대체 어떤 싸움이었기에 그럴까. 일단 발생 시점을 외우기 쉽다. ‘999’ 서기 9년9월9일 발생한 전투다. 전장(戰場)은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던 독일 북서부 지역의 토이토부르크 숲. 세계를 제패한 로마군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던 3개 로마군단은 거칠 게 없었다. 3개 기병대가 딸리고 갈리아인 보조 병단 6개 대대까지 따라 붙었으니까. 목적은 준동하는 게르만족 소탕. 사실상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호전적 게르만을 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막강 로마군에 맞선 게르만의 군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1만명에서 3만2,000명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분명한 것은 로마군보다는 병력이 적었고 무장과 장비도 훨씬 약했다는 점이다. 로마군의 패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늪이 많은 숲 지대에서 로마군의 중장비는 기동을 방해했다. 숲에서는 로마군의 장기인 대형과 전열을 짜기도 어려웠다. 반면 경무장한 게르만 족은 소부대 단위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결정적으로 폭우까지 내렸다. 로마 중장갑 보병들의 가죽 방패와 갑옷은 비에 젖고 땅은 진흙 수렁으로 변한 상황. 기동력을 상실한 채 작은 단위로 나뉜 로마군을 게르만족이 덮쳤다.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 양상으로 진행됐다. 게르만족 전사들은 원시적 도끼와 몽둥이로 나흘간 로마군을 두들겼다. 로마군 전사자만 약 2만. 사령관 바루스(Publius Quinctilius Varus·당시 55세)와 참모들을 비롯해 스스로 자결을 택한 전사도 많았다.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리거나 종교적 제사의 희생물로 바쳐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참패 소식을 보고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바루스여 바루스여, 나의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로마는 상실했던 정예군단들을 다시금 완편 부대로 재편성하지 못했다. 시내의 벽돌건물을 모두 대리석으로 바꿨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아래 전성기를 질주하던 로마가 참패한 원인은 세 가지다. 로마 당국의 가혹한 세금 부과와 현장 지휘관의 무능, 게르만족의 단결 때문이다.
반대로 게르만족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아르미니우스(Arminius·당시 27세)의 용병술.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인질로 잡혀가 로마 귀족의 자제들과 같이 교육받은 인물이었다. 로마군에 복무하며 전공을 세워 시민권과 귀족 직위까지 얻었으나 그는 종족을 잊지 않았다. 게르마니아로 돌아와 6개 부족의 전사를 모은 후 로마군을 숲으로 끌어들여 대승을 이끌어냈다.
로마와 그 후예 이탈리아 쪽에서는 정 반대의 해석도 있다. 아르미니우스는 ‘배신자’라는 것이다. 정황상 맞은 얘기다. 로마군 사령관 바루스가 유인 전술에 말려 들고 척후조를 운영하지 않았던 이유도 안내역을 자처했던 아르미니우스를 끝까지 믿었던 때문이니까. 로마는 전성기 때나 쇠퇴기를 가릴 것 없이 로마화한 게르만에게 당할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패배 이후 로마는 보복에 나섰으나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정도의 성과를 얻는 데 그쳤다. 라인강 동쪽 게르마니아를 ‘야만인의 땅’이라며 남겨두게 된 로마의 패배는 서양사의 흐름을 갈랐다. 로마가 승리했다면 기독교 성립과 공인이 늦어지고 영어 대신 라틴어가 유럽의 주요 언어로 남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게르만의 영웅 아르미니우스는 어떤 일생을 살았을까. 왕국을 세우지 못하고 내전에서 죽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독일어 성서 번역을 주도할 만큼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 이름인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어로 ‘전사(戰士)’라는 뜻을 가진 ‘헤르만’과 같은 뜻이라고 주장했다. 잊혀진 영웅의 전사로서 의미를 부각시켜 민족적 각성을 이끌려 내려고 했던 것이다.
유대계 혈통이면서도 독일 민족의 통일을 누구보다 염원했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44년 지은 서사 운문시 ‘독일, 겨울 동화’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금발의 무리를 이끈 헤르만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더 이상 독일의 자유는 없었으리라/우리는 로마인이 되었으리라.”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기고 독일제국 성립을 선언(1871)한 직후, 독일은 곳곳에 거대한 헤르만 동상을 세웠다. 독일 민족정신의 정수로 이데올로기화한 것이다.
하인리히가 노래했던 ‘금발 독일인’의 정체성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진화론과 사회적 다윈주의를 타고 ‘독일 민족의 혈통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풍조로 이어졌다. ‘위대한 아리안 민족의 부활’을 외친 히틀러의 광기도 연유를 따지면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 2,00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9년, 독일 전역에서 거국적 축제가 일어날 법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와 헤르만을 기억하되 시종 차분한 분위기를 보였다.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 국가가 민족주의의 상징을 대놓고 추앙하기에는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불과 7년, 독일에서는 네오 나치가 고개를 든다. 반성하지 않는 이웃 나라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건국절 논란을 비롯해 친일의 과거를 잊자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토이토부르크 숲 대전투의 조각을 맞춰가며 우리를 생각한다. 로마 귀족화한 게르만이라는 위치를 버리고 자기 민족에게 되돌아간 아르미니우스 같은 조상이 우리에게 있던가. 외국 시민권을 마치 고귀한 신분 증서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배반과 응징, 민족…. 2008년이라는 세월과 동서의 차이를 넘어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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