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처럼 휜 벽면 위로 7개의 문이 났다. “문 열어! 문 열라고!” 사내의 외침에 벽 너머에선 엄마의 날카로운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 해봐 이 또라이 새끼야, 여기선 지 애비 죽인 놈 용서하지 않아. 동네 똥개도 널 인간 취급하지 않을 거야.” 미친 살인마에서 이제 막 ‘탈옥수’라는 딱지까지 붙인 남자. ‘로베르토 쥬코’에게 세상의 모든 문은 닫혀 있다.
1980년대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주인공 ‘로베르트 쥬코’의 이야기가 한 편의 연극으로 한국 관객을 찾아왔다. 프랑스 극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가 1988년 실화를 바탕으로 쓴 희곡을 스위스 연출가 로랑조 말라게라와 프랑스 연출가 장 랑베르 빌드가 공동 지휘하고 한국 국립극단 단원들이 연기해 10월 무대에 올린다. 장과 로랑조는 5년 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벌들의 지혜’ ‘고도를 기다리며’ ‘리차드 3세’ 등을 공동 연출해 왔다. 로베르토 쥬코는 한 때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 공연이 금지될 정도로 소재가 지닌 충격이 컸다. 그러나 무차별적 폭력과 갈등이 일상이 된 오늘날 이토록 사실주의적인 작품은 없어 보인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장과 로랑조는 “서로 어울리지도 연결되지도 않은 사건을 한 데 그린 이 극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쥬코는 서양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라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다.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개의 문을 품은 반원형 벽이다. 무대를 직접 디자인한 장은 “총 15개 장으로 구성된 희곡이 모두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 장면 전환도 빠르다”며 “간단한 방식으로 장소를 즉각적으로 바꾸기 위해 ‘문’이라는 도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연극 ‘로베르토 쥬코’는 어머니 살해, 식탁 밑, 형사의 우울, 오빠, 지하철 등 배경과 분위기가 극명하게 다른 15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독특한 세트는 두 연출이 방문했던 서대문 형무소의 ‘격벽장’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격벽장은 부채꼴 모양의 운동 시설로 한 명의 간수가 모든 수감자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장은 이 구조에 대한 역발상으로 쥬코를 중심에 두고 주변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이는 형태를 떠올렸다고. “배우와 함께 호흡하며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를 만들고 싶었다”는 장의 바람처럼 배우들은 문을 드나들거나 문 앞뒤에서 대화하고 숨고 때론 문 위를 걸으며 희곡 상의 방대한 장소를 표현해낸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현대인의 소외·소통의 부재 등을 이야기함에 있어 문을 메타포로 해 ‘닫힘의 기능’에 주목했다”며 “서양 작품을 다룰 때 철학·추상적으로 접근하려다 놓치곤 하는 텍스트의 힘을 장과 로랑조의 연출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공연은 번역 투의 대사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도록 표현 상당 부분을 한국 현실에 맞게 손봤다.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연산을 연기한 배우 백석광이 타이틀 롤을 맡아 또 다른 광기를 선사한다. 9월 23일~10월 16일 명동예술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제공=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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