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의 뇌관으로 급부상한 독일 최대은행 도이체방크가 미국 법무부와의 협상 끝에 거액의 벌금감액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번 사태로 도이체방크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한데다 여전히 막대한 벌금 부담에 따른 재정건전성 우려가 남아 있어 파산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도이체방크 입장에서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은 내년 총선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리스크를 무릅쓰고 시행할 가능성이 낮아 도이체방크의 위기는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1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전날 도이체방크가 미 법무부와의 협상 끝에 모기지유동화증권 부실판매로 당초 부과된 140억달러(약 15조4,560억원)의 벌금을 54억달러로 삭감하는 합의에 근접했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이날 존 크라이언 도이체방크 최고경영자(CEO)는 독일 고위관리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 법무부 당국자들을 설득했다. 크라이언 CEO는 이날 도이체방크 직원들에 보낸 메시지에서 “도이체방크의 위기가 과장돼 알려졌다”며 “지난 20년간 오늘날만큼 우리 은행의 기초체력이 튼튼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미 당국이 벌금을 감액할 것이라는 소식에 폭락하던 도이체방크 주가도 반등했다. 뉴욕증시에 주식예탁증서(ADR) 형태로 상장된 도이체방크 주가는 이날 전거래일 대비 14.02% 급등한 13.09달러에 장을 마쳤다.
하지만 금융기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도이체방크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CNBC는 도이체방크의 불안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최근 헤지펀드들이 투자금을 회수한 것처럼 뱅크런이 재발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전했다. 월가의 한 관계자는 “도이체방크는 벌금 사태로 주가 급락, 투자금 회수 등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며 “투자자들의 의심을 받는 금융기관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위기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감액 이후에도 여전히 큰 벌금 부담으로 은행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2일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도이체방크의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인 5년물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234.5bp(1bp=0.01%포인트)로 전 세계 주요 은행 중 가장 높다. 이는 부도 위험이 두 번째로 높은 덱시아은행(206.01bp)과 3위인 우니크레디트(193.67bp)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자문은 “도이체방크 리스크가 다른 유럽 은행들로 번질 가능성도 높다”며 “이는 유럽 경제성장에 또 다른 역풍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최악의 경우 기댈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녹록지 않다는 점도 시장 불안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도이체방크의 자본부족 우려와 함께 사태 진정을 위해서는 독일 정부의 구제금융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지난달 30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도이체방크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은 내년 총선을 앞둔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독일 정부가 도이체방크에 공적자금을 지원할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독일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도이체방크에 대한 정부의 자금 지원에 반대하는 여론이 69%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프랑크 데커 빌헬름대 교수는 한때 독일의 긍지였던 도이체방크가 독일 국민들의 수치가 돼버렸다며 “정부의 도이체방크 지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고 밝혔다.
/이경운기자 clou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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