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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과 '라스트 사무라이'





‘정한론’과 라스트 사무라이

‘불구대천의 적인 조선을 반드시 정벌해야 일본의 위신이 선다.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안에 정복이 가능하다. 10개 대대는 강화를 거쳐 왕성을 치고 6개 대대는 경상·전라·충청 3개도를 친다. 4개 대대는 강원·경기를 점령하고 나머지 10개 대대로 함경·평안·황해 3개도를 공략하면 조선 전역을 지배할 수 있다. 무례한 조선을 방치하면 러시아나 프랑스에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조선에 파견됐던 일본 외교관 사다 하쿠보가 1870년 제출한 보고서다.

조선을 직접 치자는 공론이 나온 직접적인 원인은 새로운 국교수립을 원하던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거절했기 때문. 흥선대원군이 이끌던 조선은 ‘왜왕이 황제라 칭하고 새로운 국새를 사용’한 점을 들어 일본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했다. 당장 조선을 응징하자는 정조론(征朝論)이 들끓었다. 전쟁 비용은 조선의 풍부한 곡물로 회수할 수 있고 조선인을 끌어다 홋카이도 개발에 투입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정조론은 메이지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에 얼마 안 지나 정한론(征韓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한론의 진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정에 대한 불만. 개항과 왕정복고라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조정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많았다. 개혁의 중심에서 밀려나거나, 서구 신문물에 적응하지 못한 무사들이 조정 대신들이 외세에 휘둘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하던 시절. 일본은 무엇인가 탈출구를 찾았다. 1871년 전격 실시한 징병제로 사족(士族·무사계급)에서 낭인으로 신분이 바뀐 무사들은 대놓고 외국을 치자고 떠들어댔다.

전쟁을 외치는 자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침략 대상은 조선과 만주, 지나(중국)였고, 하나 같이 고대(古代)의 사례를 들었다는 점이다. ‘고대의 사례’란 고서기와 일본사기 등의 내용. ‘진구 황후가 신라를 쳐서 신하로 삼으니 백제와 고구려까지 스스로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는 이른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을 근거로 내세웠다.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와 관계가 끊긴 왜(倭)의 백제계와 고구려계가 신라에 대한 증오심에서 날조, 조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한정벌설’은 일본의 위기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 단골 메뉴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즈음에 나온 삼한정벌설에는 더욱 고약한 내용이 붙었다. 삼한을 정벌한 진무황후가 활의 시위로 바위에 ‘고려의 왕은 일본의 개’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고려인들이 이를 지우려 할수록 글자가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평양성 근처에도 이 돌을 직접 목격했다는 왜군 장수도 나왔다. 물론 일본이 공식적으로 조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지 않은 적도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 에도 막부를 연 뒤부터는 조선존중 분위기와 연간 세수의 10분의 1을 투입해 조선통신사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근린 관계가 200여년간 지속됐다.

그러나 일본은 개항과 위기를 시대를 맞자 또 다시 ’고대로부터 일본의 속국인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을 들고 나왔다. 일본은 집요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요시다 쇼인이 1854년 ’조선의 왕을 봉하고 조공을 받던 고대 전성기를 이어가야 한다‘(幽囚錄)고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당시 일본 유력정치가들의 스승이던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은 파당과 관계없이 퍼져나갔다. 중국이 태평천국의 난(1850~1864)에 허덕이던 1861년 에도 막부에서는 ’웅번(雄藩·존왕양이와 막부 토벌을 주도했던 죠수와 사쓰마 같은 큰 지방 세력)이 조선과 청을 치면 좋겠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이기면 다행, 지면 강력한 지방세력 억제라는 계산이 깔렸었지만 조선을 치자는 데는 정파가 따로 없었다.

외국인과 해외에 나간 일본인들도 정한론을 거들었다. 1866년 중국 광저우에 거주하던 한 일본 유생이 ‘5년 마다 한번씩 일본에 조공을 바치던 일본의 속국 조선을 도모할 것’이라는 의견 기사를 외국 신문에 실었다. 청은 이를 조선에 알렸다.(조선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일본에 조공을 바친 것으로 청이 오해할지도 모른다며 조바심을 냈단다.) 요코하마에서 발행하는 영국계 신문들도 조선의 대화 거부와 정한론, ‘조선은 옛적부터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기획 기사를 빈도 높게 내보냈다. 일본이 조선을 치면 영국의 기회도 많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을 단행한 뒤부터 더욱 거세게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듣지 않았다.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과 병인·신미 양요를 거치며 양이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일본에서는 더욱 정한론이 들끓었다. 유신 삼걸의 하나라는 사이고 다카모리은 직접 조선에 들어가 국교를 수립하겠다며 사신 파견을 자원했다. 사이고는 조선이 자신을 죽이든, 수교 요구를 거부하든 전쟁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사이고의 계획은 성사될 뻔 했다. 1873년 각의(내각회의)는 사이고를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의결했으나 단서를 달았다. 서구 제국과 불평등 조약을 고치고 문물을 배우러 떠난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올 때 확정하자는 단서는 일본 정계의 내분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구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내치에 우선할 때라며 사절 파견과 정한론을 반대한 것이다. 10월 중순께 국무총리격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사이고의 손을 들어줬다.



오쿠보 등은 즉각 사표를 내고 공작에 들어갔다. 1873년10월24일, 일본 왕 무스히토(메이지)는 내치파의 비밀 상소문을 재가했다. 정한론은 이로써 일단락됐으나 실은 새로운 파문의 시작이었다. 먼저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에서 5명의 중신이 사표를 내고 정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한파를 따라 중앙공무원으로 변신했던 사무라이들도 정한파를 따랐다. 정한파는 정한당과 우국당을 조직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쿠보 등 내치파가 조선 침략을 주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네 가지 불가 이유를 들었다. ‘내치의 정비가 급선무이고, 재정난으로 해외 정복에 나설 여유가 없으며, 교전을 틈 타 영국이나 프랑스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서구 열강이 일본에 대해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데 유독 조선의 무례만 탓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치파는 정말 한국의 사정을 이해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한론을 둘러싼 정쟁이 끝난 지 2년도 안돼 내치파는 윤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강화도 조약과 조선의 개국, 망국으로 이어진 윤요호 사건을 주도한 정부가 바로 오쿠보의 내각이었다. 정한론 논쟁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혐한과 친한의 갈등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잡느냐를 놓고 벌인 혈투였다. ‘정한론의 주도권을 쥐는 자가 일본의 권력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상대 정파에게 정한론이라는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내치 우선을 주장했던 오쿠보야말로 정한을 실행하고 성과를 낸 진짜 정한론자였다.

즉각 조선을 치자던 정한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윤요호사건으로 강화도조약이 맺어졌으니 정한론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정한론 미수용을 이유로 사직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 반란을 일으켰다. 무사 집단을 중심으로 삼은 사이고의 정병 4만명은 농민 출신의 징집병 7만명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부상 당한 사이고가 항복 권유를 마다한 자결한 뒤 370여명의 사무라이들이 감행한 최후의 돌격은 톰 크루즈가 주연한 2003년 개봉작 ‘라스트 사무라이’에 녹아 있다. 세이난(西南)전쟁으로 불리는 이 반란을 끝으로 일본은 내란을 마치고 현대화 가도를 내달렸다.

정부군이 하루평균 탄약 32만2,000발, 포탄 1,000여발을 소비한 세이난전쟁은 일본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연간 세수가 4,800만엔인 상황에서 4,100만엔이 투입된 세이난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은 세금을 올리고 종이돈을 마구 찍어댔다. 필연적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일본에 양극화의 씨앗을 뿌렸다. 세이난 전쟁과 강화도 조약에 앞선 대만 출병에서는 미쓰비시 같은 민간업자들이 기선 운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정한파가 일으킨 반란인 세이난 전쟁과 사가(佐賀)의 난 전사자만 1만5,800여명에 이른다.

대만 출병이 조선보다 쉬웠다는 점에서 택한 차선책이었다고 보면 정한론과 조선의 존재는 일본 현대사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아는 타자와 관계 속에 정립된다는 점에서 정한론은 일본의 근대화를 향한 국론 집결과 방향 설정의 진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목할 대목은 조선을 치자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한 사무라이와 조선을 나중에 치자는 상소 후에 할복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전자와 후자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기와 순서만 달랐을 뿐 조선을 치자는 원론은 동일했다는 점이다.

우리도 그러한가. 어떤 당파든 국가 이익을 위해 당론을 결정한다고 강조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의명분보다는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국민적 공분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는 후안무치란. 타자인 일본을 보자니 더욱 한숨이 나온다. 근대적 정한론의 원조 격인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아베 총리와 2011년부터 중·고교 교과서에 ‘진무 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집어넣는 우경화 분위기, 개화기 외국 언론처럼 한일 군사동맹을 부추기는 국제 정세까지…. 어지럽고 두렵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역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은 때때론 핵물리학처럼 위험할 수 있다.’ 일본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써먹은 삼한정벌설과 그 연장선인 정한론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정녕 정한론은 이젠 사라졌을까. 그리고 ‘삼한의 대왕은 일본의 개’였던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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