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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무솔리니’의 쿠데타, 로마 진군





1922년10월28일, 이탈리아 수도 로마. 긴급 각료회의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쿠데타 때문이다. 정변을 일으킨 자는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의 사병(私兵) 조직인 ‘검은 셔츠단’ 3만여명이 로마를 에워쌌다. 각료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무솔리니의 개인 군대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령을 결의했다. 로마 인근에 주둔한 군대는 검은 셔츠단보다 훨씬 많았고 무기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계엄령은 발동되지 않았다. 국왕 에마누엘레 3세가 서명을 거부한 탓이다. 국왕은 두려움에 떨었다. 수도를 방위하는 군대는 근위대 6,000여명 뿐이고 로마 외곽에는 결의에 가득 찬 10만 파시스트 무장단체가 결집 중이라고 믿었다. 과장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 국왕은 공황 상태에 빠져 정부군이 반격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버렸다. 파시스트당의 등에 업혀 국왕의 권력을 다지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의 권력은 사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에게 넘어갔다. 권력의 목전에서 무솔리니는 39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국왕의 시종 무관이 전화를 걸어 ‘권력의 일부를 내줄 수 있다’고 말하자 전화기를 그냥 내려놓았다. 몸이 달은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전권을 주라고 다그쳤다. 다음날 무솔리니는 내각 구성에 대한 전권을 내준다는 보장을 전보로 받았다.

국왕의 결정은 파격이었다. 1921년 열린 총선 결과는 최다득표를 얻은 보수당(139석)과 사회당(127석)이 제 1·2당. 여기에 인민당(107석)과 기독교민주당(68석)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켰다. 의석이 36석에 불과한 파시스트당으로서는 장관 자리 하나 얻기 힘든 세력 분포였다. 정쟁과 파업의 틈바구니에서 정국 주도권을 노린 국왕과 의회가 벌어진 틈을 무솔리니는 파고 들었다. 검은 셔츠단을 준비시켰던 무솔리니는 1922년10월24일, ‘로마로의 진군(March on Rome)’ 개시를 선언하며 분명히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이다.’

무솔리니는 6만명 이상의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행군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실제는 3만명 이하. 무장도 거의 없었고 복장마저 통일되지 않은 오합지졸의 사병 조직이었다. 행진 과정에서 경찰 400여명의 봉쇄 때문에 1만명이 넘는 검은 셔츠단의 진로가 막혔던 적도 있다. 무솔리니 자신도 후방에 숨어 지냈다. 일이 잘못될 경우 해외망명을 위해 밀라노 당사에서 대기했다. 무솔리니가 선두에서 행진을 이끄는 기록 사진은 쿠테타가 성공한 뒤에 찍은 연출에 불과하다.

한 줌의 의석에 불과한 극우 정당이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의 운명은 익히 아는 대로다.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그리스와 알바니아를 침략해 국제적인 논란과 갈등을 일으켰다. 국내 정치도 비슷하다. 집권 2년 뒤부터 비밀경찰 감시 아래 의회가 폐지되고 야당 인사들을 가뒀다. 언론에는 재갈을 물렸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후에는 유대인 사냥 광풍이 일었다. ‘검은 셔츠단’의 간부들까지 수용소로 끌려갔다. 무솔리니의 쿠데타 이후 이탈리아는 2차대전 패망까지 몰락의 길을 달렸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은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문석 영남대 사학자 교수의 저서 ‘파시즘’에 따르면 “파시즘은 피의 냄새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좌에 무혈 입성했다.” 자유주의자와 기득권 세력이 도와준 덕분이다. 이탈리아에서 하사관 상이용사 출신인 무솔리니가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독일의 히틀러를 고무시켰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하사관으로 북무하다 부상을 입었던 히틀러는 ‘파시스트의 로마 행진은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추켜 세웠다. 인류 최초의 파시즘 정권이 이탈리아에서 성립되고 독일이 그 뒤를 따랐던 결과는 참혹했다.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만 5,000만명에 이른다. 전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파쇼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죽어갔다.

나라를 말아먹고 세상을 뒤흔든 무솔리니의 쿠데타가 성공한 원인은 오로지 국왕의 그릇된 판단과 욕심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국제 자본이 무솔리니를 도왔다. JP모건 등 미국계 자본은 무솔리니를 ‘빨갱이의 파업에서 이탈리아를 구할 애국자’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의 금융자본은 영국 등에게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점령을 인정하라’는 압박까지 넣었다.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를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제재 조치를 내리려던 국제연맹을 막은 나라도 독일과 미국이다. 미국 금융자본의 대출은 이탈리아가 독일과 동맹을 맺을 때까지 이어졌다. 무솔리니에게 교황직할령을 인정받은 교황청도 미국이 파시스트에게 돈을 대주는 데 보증을 섰다.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파시즘의 광기에 대한 책임은 국왕이나 외국자본, 바티칸의 몫이 아니다. 가장 큰 책임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있다. 무솔리니를 등장시킨 주역이 이탈리아 국민 자신들이니까. 16% 정도였던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율은 로마 진군 직후 40% 이상으로 뛰었다.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독재자에 현혹 당한 이탈리아는 결국 2차대전의 축에 서고 전범국가에 속하는 말로를 맞았다.

무엇이 자존심 강한 이탈리아인을 전체주의 깃발로 내몰았을까. 두 가지다. 1차대전의 승전국이면서도 얻은 게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그로부터 파생된 ‘광기’. 독재자 무솔리니의 마지막 가는 길도 편치 않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독일군복으로 갈아입고 이탈리아를 탈출하려다 좌익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총살 당한 그의 시신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끝에 주유소에 매달렸다. 자존심도 존엄함도 잃은 채 누구보다 비참하게 죽은 무솔리니는 완전히 잊혀 졌을까. 인간은 파시즘의 망령에서 자유로울까. 그렇지 않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네오파시즘이 고개를 들고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목소리를 높인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역사란 희극과 비극을 번갈아가며 반복되는 모양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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