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시험 공화국이다. 조선조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 정승도 부모의 그늘 덕분에 음서(蔭敍)로 고려말 관직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이미 유교적 통치 이념이 자리잡은 고려 조정에서는 부모의 빽으로 고위 공무원에 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황희의 부모는 여러 번 그에게 과거를 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황희는 부모의 후광에 힘입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후 과거시험을 치러 장원급제까지 하며 본인의 능력을 보란 듯 입증했다. 급제 이후부터는 주로 학술연구와 관련된 공직을 맡았다. 우리가 세종대왕 시절의 명재상으로 기억하고 있는 황희도 제대로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수능 날이다. 해마다 60만 여명의 수험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른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선택이 하루 동안의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불합리하다 하여 두 번의 기회를 준 적도 있었고, 각 학교마다 고유의 변별력을 기른다고 본고사를 치르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입학전형 다변화를 위해 수시모집, 입학사정관제라는 미명 하에 수능 시험 이외에 다양한 대학 입학 관문이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시모집’이라는 형태로 수능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민족 역사의 루틴(routine)에 뿌리박힌 시험에 대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인재든지 간에 서열 척도로 누군가를 줄 세우는 경쟁에서 적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거둬야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관행 말이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미국의 SAT같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시험 제도를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는 교육학자들의 지적도 있지만, 변화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수능과는 조금 다르지만 사법시험, 외교관 후보자 시험, 행정고시 같은 것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우리나라다. 그토록 선진국 관행을 받아들이길 좋아하면서 시험 제도에 대해서만큼은 천지개벽을 못 일으키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역사나 문화란 쉬이 바꾸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오늘의 수험생들과 비슷한 길을 걸으며 10여 년 전 똑같은 시험을 치렀었다.
시험이라는 것은 정말 묘한 것이다.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엄청난 어감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피해자처럼 비화해 버리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기독교에서 주기도문을 외울 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고 하겠는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모두를 똑같은 잣대에 세워놓았을 때 낙오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등이 우리네 시험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국민 정서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리판단을 해 볼만한 여지도 없이 입시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10대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자기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이 열려 있는지 분석할 만한 여지가 사실상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교육이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치의 도구에 가까운 지금, 오늘 하루만이라도 모든 제도권과 사회 구성원이 나서서 아이들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쳐줄 수는 없는 걸까. 열아홉 가을, 성인의 문턱에 선 학생들 모두에게 ‘앞으로 더 험난한 일이 많겠지만 힘내라고’, ‘나도 해봤는데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어른다운 격려가 곳곳에서 들리기를 바란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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