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1년 4월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직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와 함께 정계에서 유명한 백운학이라는 역술인을 찾았다. 역술인은 김 전 총리를 쳐다보더니 대뜸 “됩니다”라며 5·16군사정변의 성공을 예고했다. 같은 해 7월 김 전 총리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저녁 자리에 그 역술인을 다시 불러들였다. 역술인은 박 당시 의장에게 “한 20년은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김 전 총리에게만 귀엣말로 “이상한 괘인데 그 무렵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다”고 속삭였다. 김 전 총리는 ‘김종필 증언록’에서 당시 경험을 서술하며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고 심경을 밝혔다.
미국의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8일 “최순실이라는 이름의 무속인이자 점쟁이(Shaman fortuneteller)가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연설문을 고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도했다. 주요 외신에서 처음으로 최순실씨를 ‘무속인’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파문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박 대통령과 최씨 간 끈끈한 관계의 이면에 ‘무속’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혹이 함께 커지고 있다.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씨가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에게 빙의돼 표정과 음성을 똑같이 재연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이 최태민씨로 거슬러 올라간 상황에서 실제 국정에 무속·역술이 개입했는지 여부는 입증하기 힘들지만 김 전 총리의 회고처럼 국내 정치의 결정적 순간마다 무속이 자리했던 것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4일 정치권에 따르면 아직도 여러 무속·역술인이 정치인들의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선거철 출마 지역구 결정부터 보좌진 채용까지 역술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최근에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어느 대선주자가 유력한지 알고 싶어하는 정계·재계 인사들과 지역 유지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역술인, 지역구 결정부터 보좌진 채용까지 ‘음지의 조언자’=정치인들의 문의가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는 단연 선거철이다. 서울 종로구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는 A원장은 “평소에도 예약이 꽉 차 있지만 선거철에는 출마·당선 관련 질문을 하기 위해 철학관을 찾는 정치인들이 많아 예약을 잡아주기도 힘들다”고 밝혔다. 후보자가 직접 오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 시선을 의식해 상당수는 후보자 부인이 남편의 사주를 들고 와서 문의하는 식이다.
당선된 뒤 국회에 입성하고 나서도 무속·역술인과의 관계는 이어진다. 국회의원회관에서 4년 동안 사용할 의원실을 배정할 때 우선권을 가진 중진 국회의원들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어느 위치가 권력을 유지하기 좋은지 조언을 받는다. 보좌진을 뽑을 때 관상, 본인과의 궁합을 본 뒤 채용하는 경우도 있다.
여권의 한 보좌관은 “어느 의원실이 나을지 무속인이 점을 볼 때 바닥에 쌀을 흩뿌린 뒤 절대 치우면 안 된다고 경고한 적도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여권의 한 중진의원이 직접 사주를 본 결과 내년까지 운이 크게 트여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이 중진의원이 내년에 ‘대세’로 거듭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정치권 이슈에 대해 무속·역술인의 상담을 필요로 하는 인물들은 정치인만이 아니다. 정치와 연을 맺은 사회 전반의 인사들이 권력의 향방과 정계 흐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 인사와 지역 유지들도 무속·역술인을 찾아 여야 중 어느 쪽에서 다음 정권을 잡을지, 유력한 실세는 누구일지 묻곤 한다. 역술인 B씨는 “어떤 사학재단에서는 개헌이 가능하냐고 묻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들만의 세상’…지인 소개로 알음알음 퍼지는 VIP 사주=정재계 VIP급 인사들은 점집을 고를 때도 ‘그들만의 세상’을 형성한다. 점을 잘 본다는 평가를 받는 곳을 소개로 알음알음 공유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속·역술인 세계에서도 어떤 인맥을 가졌느냐가 성공의 중요한 열쇠로 작용한다.
점을 보는 과정은 비밀리에 이뤄진다. 밤늦은 시간 오피스텔에서 정치인과 일대일 상담을 하기도 한다. 점집으로 사용되는 오피스텔은 ‘부띠끄 점집’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VIP급 인사들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 쪽을 많이 이용하며 강남구 역삼동에도 ‘부띠끄 점집’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용하다는 신뢰를 얻으면 역술인이 해외 체류 중이라도 텔레그램 같은 온라인 메신저를 이용해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부띠끄 점집’을 운영했던 역술인 C씨는 “큰 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복채가 500만~1,000만원을 넘는 경우도 있다”며 “복채는 주로 개인 기사나 보좌진이 따로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정치권이나 행정부 인사들을 위한 ‘접대 사주’를 진행하기도 한다. 특정 인사를 만나기 전에 기업에서 미리 그 인사의 사주를 보고 좋은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다. 접대 사주는 한번 보는데 수십만원이 든다.
이밖에 굵직한 재판 등에도 무속·역술인이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속에 관심이 많은 인물일수록 변호사뿐 아니라 무속·역술인의 조언도 받으려 한다. 가격은 최대 변호사 수임료 수준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처럼 무속·역술에 의존하는 이유로 ‘불안정성’을 꼽는다. 치열한 공천부터 선거까지 4년에 한 번씩 거치는 과정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곳곳에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비서관은 “중요한 정치·정책적 결정까지 역술인에게 맡긴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정치인들도 상담하고 의존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꾸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권경원·박효정기자 naher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