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상 가장 추악한(dirty) 선거로 평가됐던 미 대선이 의외의 결과로 나타나면서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주장해온 정책은 기존 정파의 논리에 비해 파격적이고, 분야에 따라서는 합리성과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적지 않다. 또한 현 국제관계나 미국 경제상황 판단도 정확하지 않으며 제시한 해결책의 현실성이 떨어짐에도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블루칼라 계층에게 먹히면서 트럼프의 주장은 도를 넘기도 했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주장으로 들리곤 했다.
플로리다 등 격전지 선거전략에서 보듯이 막가파 식 공약도 치밀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향후 정권인수 과정에서 집권 청사진을 마련하면서 공약 중 상당수는 다듬어질 것이고 의회 내 다수당인 공화당과의 협의를 통해 정책화될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납득하기 어려운 공약을 분석하되 당분간 워싱턴 정책 프로세스를 지켜보면서 차분히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일관되게 주장했던 공약 중 몇 가지는 서둘러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경찰 역할을 줄이겠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중국해 문제는 일본에 맡기고 해외주둔 미군에 대한 방위비 분담을 늘리겠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는 동북아 질서 유지에 근간이 돼온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의 균열을 의미하고 아시아에서 중국의 정치 군사적 위상 부상을 의미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 없는 발언들을 내놓았기에 판단이 쉽지 않으나, 집권 초기에 주한 미군에 대한 분담금을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높이도록 주문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의외의 선거 결과가 알려지자 청와대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안보 분야 못지않게 경제통상 분야에 대한 영향도 심각할 것이다. 미국 기업과 근로자에게 유리한 극단적 국익 우선주의를 거센 어투로 반복함으로써 전통 제조업 지역인 ‘러스트벨트’ 백인 근로자의 몰표를 받아, 민주당 텃밭으로 불리던 미시간·위스콘신까지 트럼프가 석권하게 됐다.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세계무역기구(WTO) 탈퇴와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폐기를 언급하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거용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 우선주의하에 고립주의를 걸을 것으로 다수 국제관계전문가들이 전망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미국에 유리한 무역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지 국제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TPP는 몇 년 동안 방치했다가 집권 후반기에 분위기를 봐서 미국의 관심사항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FTA의 일부 내용을 개정 제안할 수 있고 중국·멕시코·한국 등 무역적자국에 대한 수입규제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기업인으로 성공했고 많은 비즈니스 경험을 바탕으로 기성 정책과 정치를 부정하는 선거전략으로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국제관계는 기업의 세계와 다르다.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서로가 덕을 볼 수 있는 것이 국제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권인수위가 꾸려지면 당선인은 엄청난 정보를 접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발언 중 상당 부분은 공약(空約)으로 돌리고 진짜 공약(公約)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 혼란을 빨리 수습하고 정부는 대미 외교에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트럼프 당선인과 인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는 이미 내년에 트럼프 당선인과 사실상 미일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이 구성되는 행정부 주요 인사에게 한미 관계, 한반도 질서, 한미 FTA 등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경제학과 교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