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상장된 한국 기업이 뇌물죄를 저지르면 미국에서도 해외부패방지법(FCPA·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천문학적인 벌금과 함께 국제적인 신뢰 하락, 영업활동 제약 등 후폭풍을 맞게 된다. 이 때문에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된 기업들이 미국 FCPA 적용을 받게 될지에 재계 안팎의 관심이 높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면서도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여러 과정을 종합할 때 일부 기업들이 적용 대상에 오를 수 있지만 실제 미국의 수사 개시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
FCPA는 기업이 해외 공무원을 상대로 뇌물을 주거나(반부패 규정) 뇌물을 주기 위해 회계를 조작할 경우(회계 규정)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미국 법이지만 미국과 관련된 해외 기업에도 적용된다. 독일 지멘스가 다수의 국가에서 이 법을 위반했다가 미국에서만 8억달러(약 9,360억원)의 벌금을 냈을 정도로 처벌 수위도 높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FCPA 적용 여부는 국내 검찰이 기업에 뇌물죄를 적용할지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뇌물죄가 인정되면 FCPA 적용 가능성은 높아진다. FCPA 반부패 규정의 적용 대상은 미국 법인과 미국 통신망·계좌 이용 등 미국과 관련해 부정을 저지른 외국 기업, 미국 상장기업 또는 미국예탁증서(ADR) 발행기업 등이다. 현재 최씨 관련 수사선상에 있는 기업들 가운데 미국 현지법인이 연루된 정황은 없다. 또 미국의 은행계좌 등을 이용해 뇌물을 준 정황도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FCPA 적용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ADR를 발행한 기업으로 압축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기업 중 ADR 발행업체는 15개사가 있다. 이번 사태 관련 기업 중에서는 포스코와 KT·SK텔레콤·LG디스플레이가 이에 해당한다. 한화큐셀은 나스닥 상장사지만 이번 사태와의 관련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ADR 발행기업이 FCPA 반부패 규정을 어기면 최대 200만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ADR 발행기업은 회계 규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뇌물수수 과정에서 회계를 누락·조작한 기업은 최대 2,500만달러의 벌금에 처해진다. 특히 회계 규정은 법인의 국적과 상관없이 미국에서 증권을 발행한 기업이라면 모두 적용된다. 국내 기업 중 ADR 발행 4사가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다만 이론상 법 적용 요건이 충족됐다고 해서 실제 미국 당국이 수사에 나설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현지에서는 미국 기업이 중동이나 아프리카 국가 정부에 뇌물을 준 사례를 두고서도 왜 미국이 나서느냐는 비판이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심지어 한국 기업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뇌물을 줬다 해서 미국이 인적·물적자원을 투입해 수사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현지 검사 출신 변호사들의 의견”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ADR 발행업체인 포스코는 앞서 이상득 전 의원의 뇌물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지만 미국 당국은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법리적으로 처벌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반부패 규정은 뇌물이 공무원에게 가야 하는데 이번 사태에서 뇌물의 종착지가 최씨 일가라고 결론이 나면 범죄 구성 요건이 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박선욱 가천대 법과대학 교수는 “회계 규정 위반의 경우에도 기업 비밀에 해당하는 자료가 많아 미국 당국이 혐의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흥록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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