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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 공방전…지중해 무역의 몰락





1522년12월22일, 지중해 동쪽 에게해의 작은 섬 로도스(Rhodes). 제주도의 4분의 3 정도 면적인 로도스 섬을 차지하기 위해 6개월 여 동안 사투를 벌여온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항복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성 요한 기사단장 릴라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사 700여명에 궁수 500명, 시종과 용병을 합쳐 7,500여 병력은 10만 오스만튀르크 군대와 싸우느라 전력의 절반을 상실한 상태. 탄약도 일주일 분 밖에 남지 않았다. 견고하던 삼중 성채는 포격으로 누더기처럼 변했다.

기진맥진한 방어 측에게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쉴레이만 1세는 파격적인 항복조건을 내놓았다. ‘기사들은 장비와 재화, 성상을 갖고 12일 이내에 섬을 떠날 수 있으며 원하는 주민들도 3년 이내에 언제든지 이주를 허용한다. 남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사단 내부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없지 않았지만 기사단장 릴라당은 관대한 항복조건에 동요하는 주민들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거의 반년을 버텼던 로도스섬 공방전은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애초부터 승산이 희박한 전투였지만 성요한 기사단은 두려움 없이 전투에 임했다. 무엇보다 성채를 난공불락이라고 믿었다. 1480년에도 성요한 기사단은 기사 500명과 3,500명의 병사로 7만명을 동원한 오스만튀르크를 물리친 경험도 있었다. 유럽의 ‘기독교 형제국’들은 병력 증원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고비 때마다 무기와 식품을 보내왔다.

성 요한 기사단은 처음부터 기세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오스만튀르크가 40여문의 대포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을 때면 기사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채 성벽 위에 꼿꼿이 정렬해 포탄 세례를 맞이했다. 오스만의 군대도 집요했다. 수없이 많은 땅굴을 파고 성벽 밑으로 들어가 폭약을 설치해 성벽을 무너트렸다. 외성을 잃은 성요한 기사단은 내성으로 피해 농성을 계속하다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등극한지 1년 밖에 안된 술탄 쉴레이만은 성요한 기사단장 릴라당에게 철수할 선박이 부족하다면 자신의 배까지 내주겠다며 성요한 기사단 체면을 세워줬다. 일본인 여류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의 하나인 ‘로도스 공방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술탄은 측근에게 ‘저렇게 용감하고 훌륭한 노인을 거처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이라고 말했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자비를 베푼 28세의 술탄을 ‘진정한 기사’로 여겼다.

왜 양측은 훈훈하게 끝날 싸움을 그토록 처절하게 벌였을까. 로도스의 전략적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1453)시키고도 코앞의 로도스를 정복하지 못한 오스만튀르크는 골머리를 앓았다. 소수의 성요한 기사단이 불과 7척의 함선을 운용하면서 오스만튀르크는 물론 교역국의 선박까지 공격하는 해적 활동을 펼쳐온 탓이다. 오스만의 입장에서는 앓던 이를 뺀 격이었다. 제국의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일삼는 한 줌의 무리가 웅거한 ‘그리스도의 뱀 둥지’를 허물었으니까.



철수하며 쉴레이만을 칭송했던 성요한기사단은 적 대신 교황과 기독교 왕국을 원망했다. 애타게 바라던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신대륙 경영에 열을 올렸고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교역 루트 발굴에 정신을 팔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왕권 강화에 매진하고 있었다. 기독교 형제국들은 개전 초기에 간헐적으로 물자를 보냈을 뿐이다. 로도스에서 쫓겨난 성요한 기사단은 몰타섬으로 근거지를 옮겨 나폴레옹에게 점령 당할 때까지 영토국가로서 존재했다.

성요한 기사단은 군사력과 영토만 없을 뿐, 자체 정부를 지닌 비영토국가로서 아직까지 존재한다. 8,000여명의 기사가 각국에서 의료 구호활동 등을 펼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병원 기사단으로도 불렸던 성요한 기사단으로서는 의료로 시작해 의료로 돌아온 셈이다. 성요한 기사단의 모체가 십자군 전쟁 초기 부상자를 구호하던 아말피 병원이다. 로도스섬은 서양의학의 아버지라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도스섬 공방전은 유럽의 권력과 무역 지도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번영하던 도시국가들이 교역 루트가 막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유럽과 아시아 간 육상 교역을 거의 독점적으로 중개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세계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세력들이 떠올랐다. 오스만튀르크가 지배하게 된 지중해를 떠나 세계의 바다로 관심을 돌렸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가 주도하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로도스섬 공방전은 군사기술과 정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 한발에 저택이 무너지고 견고한 성벽이 깨지는 오스만튀르크 대포의 위력을 실감한 각국은 포병 양성을 위해 과학에 투자하고 국가상비군 체제 도입을 서둘렀다. 필요할 때마다 귀족의 기사가 소집되던 근대 이전의 동원 체제와 달리 국왕이 직접 통제하는 상비군 제도는 왕권 및 중앙 통제 강화로 이어졌다. 각국은 중앙의 주도 아래 국가의 틀을 갖춰 나갔다. 로도스섬 공방전은 작은 섬에서 일어난 전투였으나 잘 보이지 않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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