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열심히 공부해 어려운 시험에 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높은 지위일수록 지탄받는 한국의 현실과 정반대의 사례가 있다. 무대는 200여 년 전 러시아.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가진 무리가 있었다. 귀족의 혈통과 대규모 영지에서 나오는 경제력은 물론 긍지도 높았다. 나폴레옹과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공적을 세웠던 그들은 나이도 젊었다. 명예와 지위, 돈에 젊음까지 부러울 게 없던 그들은 집단적 회의에 빠졌다.
귀족 출신 청년 장교들은 ‘러시아의 귀족은 과연 귀족다운가’, ‘조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며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가만히 있으면 자연사할 때까지 영달을 누리고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 것은 전쟁.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군 장교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긴다’던 귀족의 태반이 전장에서 도망친 반면 귀족에게 짐승 취급을 받던 농노들은 목숨을 다해 침략자들과 싸웠다. 세르게이 볼콘스키 장군은 차르 알렉산드르에게 전황을 보고하면서 ‘귀족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며 고개를 떨군 적도 있다.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조국을 지켜낸 장교들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프랑스 요리를 먹으며 프랑스식 파티에 젖었던 과거를 반성하고 러시아 민중처럼 먹고 입고 말하고 마셨다. 러시아의 민족적 자각이 시작된 것이다. 동장군 앞에 무릎 꿇고 도주하는 나폴레옹을 추적해 프랑스 파리까지 입성했던 장교들은 또 한번 놀랐다. 정복군으로 파리에 들어가 반년 가량 주둔하며 러시아군 장교들은 프랑스 지식인들과 대화를 통해 조국 러시아의 낙후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국민 6,000만 명중에 5,000만명이 농노인 나라, 토지 생산성이 영국의 절반 이하이면서도 농노의 노동력 수탈로 생산한 곡물을 영국에 수출해 귀족 대지주만 떵떵거리는 나라….
러시아의 정치 현실도 서유럽과 크게 달랐다. 국왕을 처형하고 공화정을 경험하면서 자유와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진 프랑스와 달리 러시아에서 차르는 하늘과 다름 없었다. 청년 장교들은 ‘하늘이 높다, 그러나 차르는 더 높다’는 중세적 사고방식에 러시아가 결박됐다고 느끼고 행동에 옮겼다. 귀국하자마자 차르를 알현해 헌법 제정과 농노해방 등을 건의한 것.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여기에 맞장구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청년 장교들을 애국자라고 치켜 올렸다.
하지만 차르의 관심은 관심으로 끝났다. 귀가 얇고 갈대처럼 흔들려 ‘왕관을 쓴 햄릿처럼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은 걸핏하면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전장에서는 숨기바빴던 기득권 귀족들이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개혁은 물 건너갔다. 러시아가 개혁을 선택하더라도 전제군주체제라는 강력한 지도력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보수 귀족들의 논리가 차르에게 먹혔다. 차르에 대한 청원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절감한 청년 장교들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나갔다.
궁정과 귀족사회의 파티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무도회장에 칼을 찬 채로 등장해 춤추기를 거부하고 대신 학문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고 1년 뒤인 1816년 구세동맹(求世同盟·Union of Salvation)이 결성되는 1820년 가을에는 황실 근위부대인 세메노프스키 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장교는 대부분 귀족 출신이고 병사들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자유의 바람을 맛봤던 이 부대는 처우 개선을 내걸고 반란의 기치를 들었으나 곧 진압되고 개혁적 청년 장교들도 전출 명령에 따라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청년 장교들은 러시아 각지에 근무하면서도 북부동맹과 남부동맹 등 모임을 유지하며 거사를 기다렸다. 귀족의 비중이 높았던 북부동맹은 입헌군주제, 중산층 장교들이 많았던 남부동맹은 차르제 폐지와 공화정 수립, 농노제 폐기와 농지 분배를 각각의 목표로 삼았다. 북부동맹의 사상적 지도자 ‘니카타 무라비예프’가 기초했던 헌법 초안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역사는 인민들에게 속한 것이지 차르의 것이 아니다. 러시아 국민은 자유롭고 독립돼 있으며 한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최고 권력은 인민들에게서 나온다. 법을 제정할 유일한 권력은 인민들에게 속해 있다.”
남부와 북부에서 일어나는 청년 장교들의 모임은 비밀경찰과 밀정에 의해 차르에게 보고됐으나 알렉산드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함께 싸운 전우라는 동지의식이 강했고 일시적인 바람으로 여긴데다 조직력이 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르의 생각은 반은 맞았고 반을 틀렸다. 우선 틀린 것. 일시적이지 않았다. 청년 장교들의 저항은 끈질지게 이어졌다. 맞은 것은 조직력에 관한 차르의 판단. 세상을 뒤엎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남부와 북부의 청년 장교들은 1826년 봄에 거국적인 봉기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앞당겼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후계를 둘러싼 논쟁과 의혹이 일어 거사를 앞당긴 것이다. 1825년12월26일(러시아력 12월14일) 동트기 직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에서 봉기가 시작됐다. 새롭게 추대된 차르 니콜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모인 3,000여 병력은 북부 그룹의 청년 장교들이 확보했던 핵심 병력. 병사들은 선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콘스탄틴이 승계해야 하는데 니콜라이가 찬탈했다고 믿었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25년인 복무기간을 10년으로 단축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원로원 광장에 도열한 3,000여 혁명군은 니콜라이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두 가지 구호를 외쳤다. ‘콘스탄틴’과 ‘콘스치투치야(러시아어로 헌법이라는 뜻)’. 콘스탄틴의 승계와 입헌군주제 개혁을 외친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위 외에는 아무 것도 안했다는 점. 혁명군을 지휘할 예정이던 트루베치코이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다. 부사령관도 마찬가지. 결국 경험이 많지 않은 선임장교의 외침대로 구호를 따라 부르는 게 전부였다. 혁명군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합류도 막았다. 훗날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영하의 추위에서 장병들이 떠는 가운데 총성 몇 발이 울렸다. 해산을 촉구하는 노 장군을 혁명군 일부가 저격한 것이다. 몇 차례 저격이 일어나는 동안 신임 차르 니콜라이는 현장에서 모든 지휘를 맡았다. 오후 2시30분께 겨울 해가 일찍 저물고 4시께부터 진압군의 발포가 시작됐다. 니콜라이는 차르로 등극한 첫날, 유혈사태를 피하려 명령을 주저하다 인근 부대에서 합류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진압 명령을 내렸다. 황실 포병대의 지원 사격을 받은 근위대 1만명과 추위에 지친 혁명군의 싸움은 일찌감치 승패가 결정 나 있었다. 진압군의 일방적인 도륙. 차르가 통제하는 언론은 사상자를 80명이라고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1,271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근위대는 사망자와 부상자 전원을 네바 강에 던졌다. 반역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10일이 지난 뒤 남부동맹에서도 1개 연대가 반란에 나섰으나 정부군에 깨졌다. 내응하기로 약속한 인근 부대의 동원이 늦어진데다 진압군이 신속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숙청. 29세의 신임 차르 니콜라이는 분노에 떨었다. 청년 장교들의 대다수가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자란 사이였다. 관련자 600여명을 전부 잡아들인 니콜라이는 스스로 반역자들을 위한 감옥과 고문 방법을 정하고 친국(親鞫)에 나섰다. 차르는 체포된 지도자들에게 언제나 같은 말을 던졌다. “수사에 협조하면 짐은 네 목숨을 살려 줄 수 도 있노라.”
차르의 발에 입을 맞추며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장교들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생각이 옳습니다. 전하는 법 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기분에 의존하는 미래는 우리가 원했던 게 아닙니다.” 화가 치민 니콜라이는 이들을 한꺼번에 죽이기보다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 사형 대상자가 36명에서 5명으로 줄어든 것도 차르의 자비에 의한 감형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였다. 시베리아 중노동형에 처해진 대상은 121명. 자유를 꿈꾼 대가는 혹독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
대신 명성을 얻었다. 실패한 거사임에도 이들을 곧 ‘데카브리스트(Dekabrist)’라는 별칭을 얻었다. 데카브리(러시아어로 12월)에 혁명을 꾀했던 지사들이라는 뜻이다. 시베리아로 보내진 이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며 온갖 전쟁에 끼어들고 국내에서는 반동정치와 비밀경찰을 통한 압제로 일관한 니콜라이가 사망한 뒤에야 사면됐으나 이미 노인이 된 ‘청년 장교’ 들 중에서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에 그쳤다. 중노동형에서 풀려난 데카브리스트들은 각자 공부하며 시베리아 각지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농민과 원주민을 치료하고 가르쳤다. 독일의 유명 지질학자 흄볼트가 시베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그들의 학문 수준에 놀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청년 장교들 뿐 아니라 그 부인들의 순애보도 유명하다. 차르는 혁명가의 아내들에게 이혼을 전제로 하는 귀족 작위 유지를 권했으나 11명의 귀부인들이 고난의 길을 걸 었다. 귀족 포기 각서를 쓰고 풍찬노숙하며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 동토로 떠난 부인들의 러브 스토리는 러시아의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 살아 숨쉰다. 데카브리스트 25명과 인척 관계였으며 그 후원자 격이던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당시 러시아 최고 시인이라던 N.A.네크라소프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 등이 대표적이다.
데카브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세르게이 볼콘스키.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 영웅인 볼콘스키는 농노들과 고락을 같이해 농민공작으로 존경받았던 인물로도 유명했다. 차르 니콜라이의 끈질긴 회유에 ‘한 명의 차르가 신처럼 군림하는 러시아에는 미래가 없다’며 맞서 시베리아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공작부인 자리를 버리고 그를 찾아온 아내는 남편의 발목에 걸친 쇠사슬에 입을 맞췄다. 시베리아로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차르의 명령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겨진 한 살 짜리 아이는 엄마와 생이별한지 1년 만에 죽었다. 볼콘스키 부부는 각종 문화 시설을 지어 이르쿠츠크를 ‘동양의 파리’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볼콘스키가 남긴 최대의 흔적은 대작 ‘전쟁과 평화’. 볼콘스키 공작의 외손자인 레오 톨스토이가 데카브리스트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첫 번째 결과가 ‘전쟁과 평화’다. 당초에는 2부작으로 쓸 작정이었으며 전체 제목이 ‘데카브리스트’였다고 전해진다. 처절하게 깨진 거사이며 너무 일찍 찾아온 제비였다고도 평가되는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과연 실패했을까. 대부분의 국가에서 ‘무언가 불온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여겨지던 혁명가가 러시아에서는 ‘존경할 인물’로 인식된 데에는 젊음과 돈, 지위를 조국의 미래와 바꿨던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존경이 깔려 있다. 제정러시아는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92년 후에 무너졌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생전에 뜻을 이뤘다면, 차르와 기득권 귀족들이 개혁을 받아들였다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1년 전 러시아의 겨울을 달궜던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은 여전히 고매하다. 우리에게 사회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던질 엘리트가 얼마나 될까. 청문회에 불려 나온 엘리트들과 오로지 나라만 생각한다는 어떤 대통령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빠져 죽은 순간에도 대통령이 주름살을 펴고 머리를 손질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 겨울에 데카브리스트를 생각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지위와 재산, 젊음을 버렸는가. 말로만 나라를 걱정하지 마시라. 엘리트라면 국가에서 받은 것 이상으로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엘리트가 고민하고 행동해야 나라가 산다. 스스로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나라에 사는 국민은 고달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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