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12월30일, 인천항 수출 부두. 미국 화물선 워싱턴 메일스호에 수출 화물을 적재하던 일당이 당국에 의해 현장에서 잡혔다. 조사 결과 위장 수출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다. 나일론 백을 홍콩으로 수출한다며 실제로는 모래를 실어 바다에 내버렸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수출기업에 대한 특혜제도를 악용해 뒷돈을 챙긴 것이다. 먼저 일본에서 나일론 원사를 사들였다. 수출용 원자재이기 때문에 무관세로 들여온 뒤 가공 수출하지 않고 국내 업자들에게 팔았다. 값싸고 질긴 나일론 제품에 대한 인기가 높을 때라 부르는 대로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뒤처리가 쉽지 않았다는 점. 무엇보다 수출 증명이 필요했다. 무관세로 들여온 원자재를 가공해 수출하지 못하면 각종 벌금과 관세 추징금에 행정 불이익까지 당해야 하는 판에 이들은 꼼수를 부렸다. 모래나 쓰레기 등의 가짜 화물을 적재하고 당국의 승인을 받은 것. 세관이 조사할 기미가 있으면 화물의 윗부분만 수출품으로 채웠다. 바다에 나간 이들은 모래며 쓰레기를 바다에 버렸다.
수출대금은 꼬박 꼬박 들어왔다. 국내에서 처분한 원자재 대금을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화로 바꾼 다음 갖고 나가 국내로 다시 들여왔다. 수사 초기 적발된 4개 무역·제조업체의 위장 수출 물량은 2,500만원. 말단 공무원 초임 월급이 6,000원 남짓하던 시절이었으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위장 밀수 규모는 더욱 커져 억대를 넘겼다.
당시 분위기에서 위장 수출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세관 근무 경험이 많은 관세사 L씨의 기억.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 와이셔츠 수출을 시작으로 대그룹을 일궜던 K회장이 몸담고 있었던 H무역도 이런 거래를 적지 않게 했다.” 당시 일선 세관들은 밀수 수입품을 철저하게 색출했으나 수출 기업에 대해서는 도와주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일시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수출 기업이 자금 위기를 맞아 수출용 원자재를 국내에 팔아 한숨 돌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인천세관이 적발한 위장 수출 사건은 민간의 범죄가 아니었다는 사실. 위장 수출을 적발해낸 주체도 세관보다는 육군 방첩부대(국군 기무사령부의 전신)였다. 위장 수출을 자행한 장본인 역시 수출업자로 위장한 정보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공작자금 마련을 위해 위장수출한 것이다. 군 정보기관인 방첩부대가 민간인 사건을 수사하고 적발한 게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통령에서 주요부처 장관까지 군인들이 맡던 시대였으니.
나일론 백 위장수출 사건에는 육군 방첩부대와 중앙정보부 간 알력과 경쟁 뿐 아니라 권력 최상부의 암투도 걸려 있었다. 윤필용 방첩부대장과 육사 동기(8기)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간 경쟁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끼어들어 물고 물리는 알력과 상호견제가 이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부하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박정희 대통령 특유의 용인술도 나왔다.
고 이맹희 CJ 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월간지 인터뷰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관심이 많던 청와대 모 인사가 육군 방첩부대에 정보를 흘렸다. 육군 방첩부대가 중정의 밀수현장을 적발한 이후 박 대통령의 철저 수사 지시가 뒤따랐다. 윤필용 방첩부대장은 중정의 국장들을 줄줄이 연행해 구속시켰다. 다급해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청와대로 달려가 ‘위장 수출은 해외공작 자금 마련을 위한 자구책’이라고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야당이 이 사건에 주목하고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한 새로운 통로’라며 국회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주장하자 정권은 다급해졌다. 박 대통령이 윤필용 방첩부대장을 불러 ‘더 이상 말이 안 나오게 하라’고 지시하며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구속과 이어지는 재판에서도 주요 관련자들은 무죄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무죄로 풀려난 당시 중정 간부 L씨는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수사과정에서 중정이 인천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비슷한 일을 꾸민 정황이 나왔지만 더 이상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중정의 기세에 눌려 마지못해 협조한 세관원들도 풀려났다.
일반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보기관들의 암투가 개입된 중대 사건이었음에도 언론이 보도 통제를 받아들인 탓이다. 궁지에 몰렸던 중앙정보부는 얼마 안 지나 위세를 되찾았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 사건 직후, 초기 대응의 혼선에 실망한 박 대통령이 ‘기관간 업무 협조는 중앙정보부가 책임진다’는 내용의 대통령 훈령 28호를 발동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의 나일론 백 밀수사건은 완전히 잊혀진 것 같았지만 한국현대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승승장구하다 박 대통령의 의심을 받기 시작한 윤필용 장군은 권력 핵심부 인물들의 견제를 받은 끝에 1973년초 ‘윤필용 사건’으로 강제 전역 당했다. 유신 직후 서슬 퍼렇던 박 대통령은 ‘후계를 논의했다’고 의심받은 윤필용을 거세하며 그 인맥도 내쳤다. 윤필용이 대부로 알려진 ‘하나회’ 장교들이 숙청 대상에 올라, 징계받았다. 하나회 장교들의 결속력은 이 사건 이후 더욱 강해지며 1979년 10.26 사태로 빚어진 권력 공백기의 12.12 쿠데타로 이어졌다.
12.12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를 이끌던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육군 방첩부대에서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되고 1977년 국군 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 1991년부터는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며 중정을 뒤흔들었다. 소격동(방첩부대·보안사)이 남산(중앙정보부)을 두 번 혼내준 게 바로 1980년대의 ‘정화 작업’과 ‘나일론백 위장수출 사건’이다.
아무리 해외공작용이라는 명분을 들었지만 정보기관의 불법·탈법과 밀수행위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국내 산업기반을 육성하려고 세관원들이 바다와 미군 매점(PX)을 통한 밀수를 막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동안 국가의 존위를 위한다는 정보기관이 꺼리지 않고 밀수를 자행한 도덕 수준. 한국의 정보기관들이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존경과 사랑은커녕, 신뢰받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흑역사가 깔려 있다. 국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권력자의 사병 노릇을 하고 법을 어긴 게 어디 이뿐일까마는.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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