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버니 샌더스라는 인물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TV 뉴스가 아니라 영화였다.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2009년작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Capitalism:A Love Story)’에서다.
이 영화에서 무어는 ‘미국 상원에 사회주의자가 있다’며 버몬트주 무소속 상원의원 샌더스를 찾아가 인터뷰를 청한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샌더스는 망설이지 않고 답한다.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입니다.”
충격적이었다. 미국은 근현대사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없다. 건국 초기 미국의 주요 이념 중 하나인 기독교 복음주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했고 1950년대의 매카시 선풍과 냉전을 거치며 사회주의는 일종의 금기어가 됐다. 그런데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상원의원이라니.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부의 기능은 부자와 권력자가 아닌 중간 소득층(middle income)과 노동 계층(working people)을 대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샌더스는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탐욕을 숭배하고 있어요. 떼돈 번 사람들의 사진을 잡지 표지에 올리지만 경찰·소방관·교사·간호사는 무시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증진(improving)하기 위한 일을 매일 하는데도요. 우리는 가치 체계(value system)를 바꿔야 합니다.”
결국 샌더스가 주장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그렇게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개선하는 데 정부의 역량을 집중하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자는 얘기는 어릴 때부터 배운 일종의 사회적 도덕률이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이런 이상을 실천하지 못할 뿐인데 샌더스는 이를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샌더스가 장차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가 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양당제 국가인 미국에서 양대 정당에 아무런 세력이 없는 풀뿌리 출신 무소속 정치인이 거대 기득권 정당에 들어가 최고의 정치 엘리트와 대통령 후보를 다툰 일은 21세기에 쓰인 미국의 기적이다.
공교롭게도 대선 승자인 도널드 트럼프 또한 양당의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것은 샌더스와 똑같다. 그러나 또한 공교롭게도 트럼프는 샌더스가 비판하던 ‘잡지 표지를 장식한 부자’다. 샌더스 열풍이 무색하게도 재벌급 사업가이자 반쯤은 연예인이고 한마디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총아(寵兒)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
샌더스가 미국 19개주의 최저임금 인상을 축하했다는 뉴스가 새해 들어 나온 것을 보면 그는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령과 미국 정치의 관행을 볼 때 그가 미국 대선판에 다시 나서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쓴 서민과 풀뿌리의 기적이 미국과 주변국 정치에 작은 영향을 미치기를 바랄 뿐이다. 샌더스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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