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Emile Zola·1840~1902). 하층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린 ‘목로주점’으로 유명한 소설가다. 19세기 중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문호. 하지만 졸라는 작가보다도 인류 양심사에 빛나는 지식인으로 기억된다. 1898년1월13일자 ‘로로르(L’Aurore)’지 1면 전면에 실린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시대를 뛰어넘어 진실과 정의, 지성과 용기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졸라에게 집필 동기를 준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인 소설가 알퐁스 도데. 헝가리계 미국 언론인 겸 작가인 니콜라스 할라스의 ‘드레퓌스,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에는 이탈리아 체류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졸라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집단적 광기와 맞서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하루하고 반 나절 동안 꼬박 매달려 글을 다듬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 졸라는 왜 소설이 아니라 사회고발에 나섰을까.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간첩 사건이 거짓과 맹목적 국수주의, 광기로 가득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전말은 이렇다. 사건이 시작된 시기는 프랑스군 포병 화기와 편제, 부대배치 등 비밀이 독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확인된 1894년7월. 프랑스군은 단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드레퓌스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조사 과정에서 혐의가 나오지 않았으나 프랑스 군사법원은 1894년 말 드레퓌스 대위에게 법정 최고형인 종신유배형을 내렸다. 선고 2주 뒤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집행된 공개 군적 박탈식에서 드레퓌스의 계급장, 단추, 바지 옆줄이 뜯겨 나갔다. 장교의 상징인 군도 역시 조각났다. 군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다시 2주가 흘러 유배지인 악마의 섬(영화 ‘빠삐용’에 나온 감옥섬)으로 가던 도중에는 분노한 군중에게 얻어맞았다.
악마의 섬에 갇힌 드레퓌스가 잊혀져 가던 1896년,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방첩대장으로 부임한 뒤 미심쩍은 부분을 재조사하면서 묻혀 있던 사실들이 드러났다. 결국 페르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으로 밝혀졌다. 정작 보고를 받은 프랑스 군부는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했다. 귀족 출신인 에스테라지를 반역죄로 처벌하면 군부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우려에서다. 피카르가 명령에 불응하고 법정에 세운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도리어 진실을 밝혀낸 피카르가 튀니지로 쫓겨나 군사기밀 누설죄로 감옥에 갇혔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이런 배경에서 쓰여졌다. 처음에는 발행 부수가 많은 유력지에 낼 생각이었으나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소책자로 발간하기 전에 만난 ‘로로르’지의 발행인 조르주 클레망소(훗날 총리직에 올라 1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인물)는 원고를 보자마자 신문에 싣고 제목도 바꾸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당초 졸라가 생각했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나 결국 제목을 바꿨다.
졸라는 먼저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프랑스는 자기 얼굴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역사는 이런 죄악이 각하의 통치기간 중에 일어났음을 기억할 것입니다.…(중략)… 나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불의에 눈 감는다면, 앞으로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이 가득한 밤 말이지요.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나는 명예로운 당신이 진실을 알았다면 외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고발했다. “나는 뒤 파티 드 클람 중령을 고발합니다. 법적 오류를 야기한 악마적인 장본인이었습니다. 나는 펠리외 장군과 라바리 소령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편파적 수사를 펼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1894년 제1차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불법적으로 전달된 비밀 자료에 근거하여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을 위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국방성을 고발합니다. 여론을 오도하고 죄악을 은폐했습니다. ‘에코 드 파리’와 ‘르끌레르’를 위시한 신문들이 저열한 캠페인을 펼쳤음도 고발합니다.”
장문의 편지 형식을 빌린 기사는 파장을 낳았다. 하루 3만부 정도이던 이 신문의 판매 부수가 30만부를 찍었다. 졸라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3만 통이 넘는 편지와 전보가 쏟아졌다. 아나톨 프랑스 같은 문인과 지식인들도 지지하고 나섰다. 반대는 더욱 많았다. 파리의 군중들은 ‘졸라와 유대인을 죽여라’라는 깃대를 들고 도로를 행진했다. 프랑스 군부는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군의 비밀을 내보이라는 것과 같다’며 ‘그렇게 된다면 독일과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놨다.
프랑스는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대 반(反)드레퓌스. 정당과 언론이 분열되고 서로를 공격해댔다. 교회는 일방적으로 군부 편을 들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양분된 프랑스를 보며 ‘뉴욕 헤럴드’지에 이런 기고문을 보냈다.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 들은 한 해에도 백만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문화적 후진 지역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신문들도 프랑스를 조롱했다. ‘이러고도 프랑스가 계몽국가인가?’
프랑스 사법 당국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된 군인과 필적감정전문가, 각급 군부대, 언론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고발해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졸라는 이를 각오하고 ‘나는 고발한다’를 썼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이로 인해 내가 법정으로 끌려가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 다만 공정하게 나를 심문하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법정에서 졸라는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언합니다. 만약 그가 유죄라면 신(神)이여! 제가 40년간 이룬 모든 것이 파멸되고 저의 모든 작품이 잊혀지게 하옵소서. 드레퓌스는 죄가 없습니다.’ 프랑스 법정은 졸라에게 징역 1년, 벌금 3,000프랑을 매겼다. 실형을 선고받고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졸라는 말했다. “내가 유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는 나라의 명예를 구해준 나에게 감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졸라 재판은 유럽 왕실끼리도 관심사였다. 독일 왕실에는 혈연 관계가 있는 유럽 각국의 왕실로부터 ‘드레퓌스가 독일을 위해 봉사한 적이 있냐’는 호기심 어린 문의가 몰려들었다. 독일은 아니라는 답신을 보냈다.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파 간의 공방은 프랑스 정치권력의 향방도 바꿨다. 1898년 5월 의회선거에서는 반유대, 반드레퓌스파가 승리했다. 졸라와 피카르 중령도 더욱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1902년 의회선거에서는 드레퓌스 지지 연합이 이겼다. 1899년 6월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왔으나, 감시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드레퓌스 지지파가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활동이 자유로워졌지만 의문의 질식사로 사망했다. 집필을 시작한 드레퓌스 사건 소설 ‘진실’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졸라의 유해는 1908년에야 프랑스 위인들의 안식처인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드레퓌스는 졸라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1906년 프랑스의 민군통합법정에서 무죄와 복권 판결을 받았다. 포병 소령으로 복귀한 드레퓌스는 군적 박탈식을 당했던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훈장 수여 열병식을 치렀다. 알자스의 부유한 방직업자 가문의 일원이던 드레퓌스는 바로 전역한 뒤 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원 입대, 최전방의 포병대대장으로 공훈을 세웠다. 동생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드레퓌스의 형이 낳은 아들들과 사위는 모두 1차 대전에서 죽었다. 드레퓌스는 전후 예편해 1935년 눈을 감았다. 피카르 역시 군에 복귀하자마자 준장으로 승진하고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드레퓌스와 반드레퓌스 진영은 2차 대전에서도 행태가 갈렸다. 드레퓌스 지지 진영은 주로 레스지탕스로 독일에 저항한 반면 드레퓌스를 독일의 간첩이라고 몰아세웠던 반드레퓌스 진영은 친독일 괴뢰 비시정권의 휘하로 들어갔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거짓을 일삼던 세력이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외적에 붙어버린 셈이다.
졸라의 고발로부터 119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 진실을 위해 고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지식인이 얼마나 될까. 피가르 중령처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군인이 불이익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한 줌의 기득권을 위해 거짓의 편에 섰던 당시 프랑스 성직자와 비슷한 종교인도 적지 않다. 19세기의 졸라가 21세기의 현대인을 부끄럽게 만든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자기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안에도 간섭하는, 아니 간섭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간섭했던 졸라는 진실의 힘을 믿었다. ‘진실이 행군을 시작하면 그 무엇도 길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지하에서도 무섭게 자라 병든 세상을 쓸어버릴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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