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야당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대기업 불공정 행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기업분할명령제 도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기업분할명령제는 정부의 규제만으로 대기업의 독과점 폐해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면 법원의 명령으로 기업을 분할하도록 하는 제도로 야권의 대선주자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장해온 것이어서 여권발 경제민주화가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2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정책쇄신안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새누리당은 국민과 동떨어진 정책과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국민 신뢰를 잃었다”며 “그간의 적폐를 모두 일소하고 새로운 보수 가치를 정립하는 재창당을 추진하겠다”며 이 같은 내용의 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제는 보수를 개혁해야 한다. 포장지만 살짝 바꿔 국민의 눈을 속이는 개혁은 하지 않겠다”며 정치·정당·정책 등 3개 분야의 ‘3정 혁신’을 통해 획기적인 재창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쇄신과 관련, 최순실 사태로 드러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출연금 강제모금과 같은 ‘준조세 징수’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해 권력자와 기업을 함께 형사처벌하는 가칭 ‘기업의 김영란법(정경유착형 준조세 금지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보고 기술 탈취, 납품가 후려치기, 각종 갑질, 불합리한 어음제도 등 중소기업을 고사시키는 행태를 근절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대기업이 중소기업 특허를 침해할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대폭 강화하고 공정거래 질서 확립을 위해 대기업의 불공정 위법 행위에 대한 최고 수위의 제재, 가맹사업법 등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소비자 관련 집단소송법 개정,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준 강화 등에 나서기로 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불법 행위를 통해 얻은 이익보다 훨씬 큰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로 미국·영국 등에서는 일반화돼 있으나 국내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되면 불법 행위로 얻은 이익의 10∼20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부담해야 할 수도 있어 재계에서는 이 제도의 도입에 극구 반대해왔다. 재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카드를 꺼내 든 것은 그동안 대기업·기득권에 편향된 정책을 펴왔다는 비판을 잠재우고 중소기업 위주의 정책으로 전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더 나아가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불공정이 구조적으로 시정되지 않을 경우 기업분할명령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이날 발표한 정책쇄신안들은 사실상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으로 보수정당을 자처해온 새누리당이 야권이 주도해온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선명성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인 위원장은 “야당이 주장한 것이라도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면 주저할 까닭이 없다”며 “당 기구에서 준비해 야당과 협상이 필요하면 협상하든지, 이른 시일 내 실현되도록 하겠다”고 야당과의 합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재계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새누리당마저 강력한 대기업 개혁 방안을 들고 나오면서 야당은 물론 보수 진영의 경쟁 상대인 바른정당까지 대기업 개혁에 발 벗고 나설 가능성이 커져서다.
/김홍길기자 wha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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