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우성은 스크린에서 연이어 악역 연기를 선보이며 그를 ‘청춘의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감시자들’에서는 침묵의 살인자 ‘제임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아수라’에서는 더 큰 악을 무너트리기 위해 폭주하는 악당 ‘한도경’을 연기했다. 그리고 1월 18일 개봉해 흥행가도를 질주중인 영화 ‘더 킹’에서는 한 단계 수준이 올라가 대한민국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검사 ‘한강식’을 연기한다.
‘더 킹’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한강식’은 그동안 익히 봐오던 ‘끝판왕’급의 악역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 있다. 대부분의 악당들이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악을 자행하는 반면, ‘한강식’이라는 인물에게는 그가 행하는 ‘악’조차도 악행이 아닌 역사의 흐름이나 시대적 요구에 따른 대의처럼 포장된다.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그가 내세우는 논리는 일견 타당해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독한 부조리로 가득하고 ‘한강식’은 그 말도 안 되는 부조리에 취해 자신이 정의인 것처럼 행세한다.
“처음 시나리오에서 ‘한강식’을 봤을 때부터 무너트리고 싶었어요. 그가 자리를 감싸고 있는 외피는 품위있고 우아할지 모르지만, 속내는 추악하잖아요. 그렇기에 관객들이 한강식을 스크린으로 볼 때, 내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한강식을 무너트리고 싶었던 그 심정처럼 비웃을 수 있는 그런 인물로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 ‘더 킹’이 개봉한 직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그가 연기한 ‘한강식’이라는 인물에 대해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보통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설득력 있는 연기를 위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악역일지라도 그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우성은 그 반대였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한강식’이라는 인물이 너무나도 밉고 증오스러웠기에, 그를 무너트리기 위한 연기를 펼쳐낸다.
“‘더 킹’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블랙코미디라는 것이 느껴졌고, 한재림 감독도 이 영화를 풍자와 해학을 담은 마당극처럼 유쾌하고 통쾌하게 봐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 풍자와 해학 속에서 저는 애정보다 ‘증오’로 한강식이라는 인물에게 다가가면서 좀 더 캐릭터가 가벼워지고 망가져내릴 수 있었죠. 그 증오가 바로 내가 ‘한강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어요.”
‘한강식’에 대한 정우성의 분노와 증오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 ‘더 킹’은 태수(조인성 분)라는 인물이 출세를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신군부로 대표되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 30년을 되짚어낸다.
이 과정에서 영화와 현대사의 접점도 수없이 포착된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검찰 내부에서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중 어느 쪽에 줄을 대어야 할지 고민하며 무당을 찾아가는 모습이나, 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영화에서 극적인 전환점의 일부로 작용하는 모습 등이 그렇다.
정우성이 연기한 ‘한강식’에게 가장 극적인 접점이라면 역시 故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이명박 정권의 표적수사로 검찰조사를 받게 될 당시, 이 모습을 검찰청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미소짓던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의 미소를 정우성이 재현하는 장면이다. 아직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영화를 보다가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촬영 후반에 홍만표와 진경준 스캔들이 터졌어요. 그 모습에 영화가 개봉하면 빗대어 볼 수 있는 스타들이 탄생했다고 우리끼리 말했죠. 그 장면은 현실에서 울분을 자아내던 모습이잖아요. 그 모습을 연기한다고 제가 울컥해선 안 됐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이 보면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저런 미소가 나올까 궁금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제가 그렇게 ‘한강식’을 연기해냈을 때 관객들의 입에서는 ‘저 개새끼’라는 욕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영화 ‘더 킹’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관객들이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는 것은 태수(조인성 분)가 처음으로 한강식(정우성 분)을 만나는 펜트하우스 장면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검사라는 ‘한강식’부터 시작해 재벌, 대형 언론사 정치부 기자 등이 모여서 질펀하고 지저분하게 유흥과 환락을 즐기는 이 공간에서 ‘한강식’은 아직 자신의 ‘정의’를 버리지 못한 ‘태수’에게 일제시대부터 이어지는 권력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 순간 ‘한강식’을 연기하는 정우성의 얼굴에서 괴벨스나 히틀러의 그림자를 엿보았다면 그것은 결코 당신의 착각이 아니다.
“정치검찰에 대한 문제점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다뤄진 문제였어요. 대부분의 검사들은 정의를 수호하는 올바른 검사가 되려고 하지만, 검찰이라는 조직적 분위기 안에서 출세를 하려면 자신의 양심을 매매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죠. 그렇게 양심과 출세 사이에서 갈등할 때 누구나 유혹받을 수 있는 표상이 바로 ‘한강식’이에요. 그래서 ‘한강식’을 연기하기 위해 히틀러의 연설장면을 많이 참고했어요. 히틀러가 연설을 할 때보면 손짓을 굉장히 잘 활용해요. 그런 모습들을 참고하며 ‘한강식’을 만들어갔어요.”
박근혜 정권에서 작성된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가 화제인 가운데 정우성도 그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노골적인 정치적 행동을 펼친 적 없는 정우성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상당히 큰 파문을 가져왔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 자체도 허용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정우성처럼 특별한 정치활동 없이 그저 그가 믿는 올바른 사회적 정의를 평소 소신처럼 이야기해온 배우까지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현 정권의 감시가 폭넓게 이뤄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아수라’ 특별 시사회 당시 ‘박근혜 나와’라고 한 것은 영화 속 ‘박성배 나와’라는 대사의 패러디였어요. 당시만 해도 합리적인 의심의 범주 안에서 현 정권의 국정농단에 대한 의심이 있던 시기였고, 그러다보니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근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인격모독으로 법의 범주에서 적당한 처벌을 받으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배우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를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이런 걱정을 해야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세상인 것이죠.”
이제 40대를 넘어 50대를 향해 다가서고 있는 정우성은 자신이 ‘청춘의 아이콘’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기성세대’라고 인식하며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선배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준비하고 있다.
“세대가 바뀐다는 것에 대한 인정, 이것이 중요해요. 이제는 저보다 더 젊은 친구들의 세상이에요. 그 세상에 내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게 ‘정우성’이라는 존재를 어필하기위해 무리하는 것은 욕심이 될 것 같아요. 젊은 친구들이 중심이 되면서 문화적으로 잃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 제 할 일은 그런 요소들이 우리의 작업에서 소멸되지 않도록, 지켜내려고 하는 의식을 주입하는 그런 작업을 통해 함께 해 나갈 수 있겠죠.”
“영화감독에 대한 생각은 2000년대 중반이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아요. 지금도 언제나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한동안 글로벌 프로젝트를 준비하다 좌초되면서 배우로서 관객들과 거리가 좀 생겼었는데, 그래서 배우로서 좀 더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서야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배우에 전념하고 있을 뿐이에요. 여태 구상했던 스토리를 가지고 나올지,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를 찾던지 조만간 영화감독은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원호성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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