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공식 선언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한 국제 무역질서의 한 축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글로벌 교역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주도해온 TPP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발을 빼면서 미국을 구심점으로 이뤄졌던 자유무역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국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은 자유무역 수호의 새로운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TPP에 밀려 정체됐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논의에도 속도를 낼 태세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2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TPP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TPP를 뒤집으면서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위상이 급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TPP 탈퇴로 경제동맹이 흔들리면서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뜻이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모든 미국의 전통적 경제·정치 동맹들이 이제 재평가·재협상에 노출됐음을 세계에 통보한 격”이라며 “세계 경제·정치에서 영향력과 리더십을 유지할 미국의 능력에 장기적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이번 결정이 미국의 신뢰도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면서 “중국에 전략적 기회를 주게 된다”고 비판했다.
미국 주도의 TPP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TPP 이탈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미국의 TPP 탈퇴가 중국의 RCEP 구상에 어부지리로 작용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주도하는 RCEP는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다자무역협정으로, 중국은 RCEP와 신실크로드 구상을 통해 미국에 대항하는 서남아시아 동맹 구축을 추진해왔다. 미국의 이탈로 TPP가 흔들리는 지금, RCEP이 다자무역협정으로 성장의 돌파구를 찾는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 좌초 위기에 직면한 TPP 참가국들까지 흡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일각에서는 TPP 폐기가 확정될 경우 페루와 칠레는 물론 일본도 RCEP에 동참할 수 있따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 같은 상황을 의식한 중국 정부도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초래한 세계 무역질서에서의 리더십 부재를 기회 삼아 중국이 새로운 리더 역할을 맡겠다고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장쥔 중국 외교부 국제경제국장이 이날 베이징에서 외신기자들을 만나 “중국의 지도자 역할이 필요하다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주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보호무역주의를 비판하며 스스로를 자유무역 수호자로 자리매김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중국 경제매체 이머니도 “중국의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확대할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올해 안에 RCEP 협상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미국의 TPP 탈퇴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재협상 선언에 관련국들은 서둘러 대안 모색에 나서고 있다. 미국 TPP 탈퇴 선언의 최대 피해자인 일본과 호주 등은 ‘미국을 제외한 TPP’를 차선책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호주는 중국 등에도 TPP문호를 개방하고 미국의 부재를 메운다는 입장이지만 최대 지분국인 미국 없는 TPP의 동력이 유지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에 개방된 나라”라며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 기회를 늘리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유럽연합(EU)은 멕시코·콜롬비아·칠레·페루 등 중남미 국가들과의 태평양 동맹을 추진하며 세계 시장에서 EU의 영향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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