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2월14일, 로마 남서부 센토셀레 공항. 비행기 11대가 차례로 솟아올랐다. 가프로니사(社)의 Ca.3 중(重) 폭격기 4대와 아살도 사(社)의 SVA-9 훈련 겸 정찰기 7대로 이뤄진 편대가 동시 이륙할 때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비행기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편대의 최종 목적지는 일본 도쿄(東京).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기로 활용가치가 입증된 항공기의 가능성을 널리 알리고 기록에도 도전하기 위해 도착지를 극동으로 잡았다.
이탈리아와 일본 언론들은 ‘1만 1,000마일(1만 7,700㎞)의 대모험’이라는 기사를 연일 쏟아냈다. 신문 기사대로 분명한 모험이었다. 비행기의 성능을 신뢰할 수 없는 데다 항속거리가 고작 500~600㎞여서 끊임없이 착륙해 연료를 보급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지상 정비시설도 완전하지 않았다. 상승한도 역시 4,000m 안팎이어서 높은 산을 만나면 비행 성능이 떨어졌다. 기대를 받으며 대장정에 오른 11대 기체 중에는 이탈리아를 벗어나기 전에 추락한 기체도 있다.
숱한 어려움 속에 일본 도쿄에 안착한 기체는 2대. 이탈리아 육군 소속의 페라린과 마쉐로 중위가 조종하는 SVA-9기 1대가 먼저 도쿄에 닿았다. 가파니니와 마렛트가 조종하는 또 다른 SVA-9기는 마카오에서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돼 두 조종사는 선편으로 베이징까지 이동, 새로운 SAV-9기에 올라 나머지 여정을 마쳤다. 전 과정을 비행하지 않았기에 온전하게 비행에 성공한 기체는 단 한 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로마를 출발한 이탈리아 비행단은 106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실제로 비행한 날은 23일. 비행시간 기준으로 보면 109시간을 날았다(두 번째 도착 SAV-9기의 비행시간은 112시간). 정비와 연료 공급에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그다드에서는 축구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일정이 지연됐다. 환영 행사나 기후 불순으로 비행이 1주일씩 미뤄진 적도 많다. 인도와 동남아 지역 이전까지는 주로 날씨가 나빠서, 중국에서는 환영하는 중국인 인파가 많고 항공기 구매 희망자마다 피로연을 베풀기 원해 일정이 늦춰졌다.
이탈리아 비행단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커다란 화제였는지 막 태동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적극적인 보도 경쟁을 펼쳤다. 페라린의 기체가 신의주에 도착했을 때는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할 만큼 높은 관심을 보였다. 경성에 도착하는 장면을 조선일보는 1920년 5월26일자(지령 22호)에 이렇게 실었다. ‘멀리 동북편 하늘 구름으로부터 아물아물하는 검은 한 점이 흡연히 솔개와 같이 영자(英姿·매우 늠름한 모습)를 들어내며, 남산의 허리를 스치고 경성 시가를 둘러서 다시 용산을 돌아 여의에 이르러, 착륙장 주변 수만 군중의 머리 위로 야실야실 스칠 듯이 한 바퀴를 돌아, 1시 50분 가만히 육지에 내렸는데, 이때 군중은 바시 박수하야 여의도 모래가 손바닥 바람에 날리게 되었더라.’
이탈리아 비행단의 장거리 비행은 고난 끝에 가까스로 성공했으나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항공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구미 각국은 저마다 모험에 뛰어들었다. 영국-호주 구간, 대서양·태평양 무착륙비행 등이 시도되며 항공기 제작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이탈리아 비행단의 모험은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이어진 ‘장거리 항공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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