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간부 B’, ‘사채업자’ ‘철거민 4’
그가 맡은 배역은 이름 대신 직업이나 직함으로 불렸다. 2012년 ‘7번 방의 선물’에서 연기한 신봉식이라는 인물은, 2003년 영화계 입문 후 10년 만에 처음 받은 ‘이름 붙은 배역’이었다. 1993년부터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한 정만식(43·사진)에게 무명시절은 20년가량인 셈. 선 굵은 얼굴 덕에 ‘베테랑’ ‘대호’ ‘아수라’ 등에서 주로 센 캐릭터를 연기한 그가 오는 15일 개봉하는 ‘그래, 가족’에서는 마음 약해서 사기당하고, 가족에게도 구박받는 장남 성호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주연으로 ‘제2의 데뷔’를 하는 그를 최근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약자 앞에서 한없이 강하고 강자 앞에서는 어깨를 반으로 접는’ 인물 연기의 달인이던 그가 무능한 오빠이자 가장 역을 맡은 이유는 시나리오를 읽고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기하면서 집에 경제적으로 도움도 안 됐고, 여러모로 저랑 비슷한 것 같았다”는 그는 “한때는 단란했지만 경제 문제 등으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성호와 가족들이 화해하는 이야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털어 놓았다.
연기는 베테랑이지만 주로 맡았던 역할도 장르도 아닌 까닭에 힘든 점이 많았다. 그는 아내와 두 여동생들에게는 구박받고, 일하는 유치원에서는 꼬마들에게 비위를 맞추고, 딸들에게는 다정한 모습도 보여주는 ‘일상연기’로의 변신을 꾀했다. “누군가를 윽박지르고 협박하는 그 목적 자체에만 집중하는 센 역할이 연기하기는 쉽지만, 일상 연기는 여러 관계 속에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에 신경 쓸 것이 많아요.”
영화가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촬영 내내 엄마, 두 누나, 형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자꾸 생각났다.
“수원의 작은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대학로로 왔어요. 돈이 필요해서 잠시 연기를 접고 영업 일을 했는데 돈 많이 벌어서 진짜 부잣집 아들처럼 막 쓰고 다녔죠. 그럴수록 마음은 더 허했고 술 마시고 자꾸 사고를 치니까 엄마와 누나들이 ‘그냥 연기만 해라, 돈 벌지 말고’라고 말리더라고요. 그때부
터 진짜 연기만 했어요. 그렇게 도와준 가족이면서 누나는 얼마 전 수술을 하고도 저에게 알리지 않아 엄청 화를 냈어요. 아프면 신경 쓰는 게 가족인데…봉투를 놓고 왔더니 누나가 다시 전화를 해서 ‘(수술비)반만 넣지 왜 다 넣었냐, 돈 벌어서 다 나한테 쓰냐’며 또 우는 거예요. ‘돈은 이럴 때 쓸라고 버는 거라고’ 말하면서 또 화를 냈네요. 다정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는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남자이자, 막내아들이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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