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환율조작을 ‘불법 보조금’으로 간주해 무역 상대국에 상계관세를 부과하려는 것은 주요2개국(G2)인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일본·독일·한국·대만 등 대미 무역흑자가 큰 나라들을 한꺼번에 제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환율 문제를 통상장벽으로 활용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은 주요 교역국들의 보복조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전방위 무역전쟁의 악순환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환율을 무역전쟁의 무기로 앞세우는 것은 글로벌 통상질서의 주축인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 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다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는 상대국들 역시 유사한 조치로 맞대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이 바꾸려는 환율전쟁의 룰이 자칫 세계 경제를 더 큰 무역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공약으로 취임 첫날 미국의 최대 무역적자국인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중국 수입품에 4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국만 겨냥한 공격은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이 큰 탓인지 이러한 공약은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 축소는 여전히 트럼프 정부의 최대 과제 중 하나다. 이를 주도하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은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환율조작을 불법 보조금으로 간주해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중국에 비판적인 나바로 위원장은 교수 시절부터 ‘통화 절하=무역 보조금’이라는 주장을 견지해왔다. 기업인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도 이런 주장에 강한 공감대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환율조작 관행을 불법 보조금으로 간주하는 조치를 확정하면 자국 화폐가치를 의도적으로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인 국가를 지정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제재할 수 있게 된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하순 중국산 트럭 및 버스용 타이어에 정부 보조금이 지급됐다고 보고 중국 업체들에 39~66%의 상계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문제는 환율조작이 특정 산업이나 품목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포괄적 경제행위이므로 제재 역시 무역 전반에 걸쳐 이뤄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WTO 규정 위반에 해당된다. 우리 정부의 한 통상 관계자는 “WTO에서 규정한 불법 보조금은 정부가 지급하면서 ‘특정 산업 또는 품목’과 연계되는 것인데 환율조작은 포괄적 행위여서 보조금에 해당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환율조작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미국이 주요 무역상대국을 향해 환율조작의 낙인을 찍는 순간 상대국이 곧바로 똑같은 보복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도 환율조작을 무역제재의 수단으로 검토하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달러 가치 하락을 유도한 정책들에 대해 상대국들도 (환율조작으로)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지적해 중단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미 정부의 환율관찰국이나 조작국 지정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환율조작국 지정 문제를 다룰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13일(현지시간) 의회 인준을 통과했지만 통상정책을 주도할 윌버 로스 상무장관 지명자가 아직 인준을 받지 못한 만큼 환율 문제를 무역제재의 수단으로 미 정부가 공식화하기까지는 좀 더 협의가 진행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백악관의 구상이 수정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에도 미국의 3대 무역적자국인 중국·일본·독일을 향해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해온 만큼 어떤 식으로든 환율 문제가 통상전쟁의 뇌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워싱턴 관가에서 지배적이다. /뉴욕=손철특파원 이태규기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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