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의 기로에 서 있는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내각 구성이 순탄치 않았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 대통령은 출범 초기 ‘강력하고 힘찬 정부’를 표방했지만 정작 현실은 달랐다. 새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후보자가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중도 낙마하면서 출발부터 삐거덕거렸고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장관 후보자들도 대통령 취임식이 임박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이 여야 간 이견으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데다 내각 인선을 위한 인사청문회 일정도 지연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위원들은 내정자 신분으로 새 정부의 출범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출범 초기 대부분의 국정과제들을 강도 높게 추진해 성과를 거두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야심 찬 목표는 시작부터 어긋난 셈이다.
집권 2년 차에 접어들어서도 내각 인선에서 촉발된 박근혜 정부의 국정 난맥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지난 2014년 박 대통령은 신임 총리로 안대희·문창극 후보자를 잇따라 지명했지만 두 후보자 모두 인사청문회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중도 사퇴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인사 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키는 결정과 함께 박근혜 정부는 조기 레임덕(권력 공백)으로 빠져들었다.
10년 만에 보수정권으로의 권력교체에 성공한 이명박(MB) 정부도 출범 초기 인사 파동에서 비롯된 국정 혼란은 피하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이른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과 ‘강부자(강남 부자)’ 인사 논란에 휩싸이며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혔다. 여기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민심이 급격히 얼어붙으며 취임 초기 지지율이 10%대까지 곤두박질쳤다. 이후 이명박 정권이 제자리를 잡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핵심 실세였던 정두언 전 의원은 회고록을 통해 “MB 정부 초기의 잇따른 인사 실패가 민심이반을 급속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정치개혁의 열망을 안고 닻을 올린 노무현 정부도 출범 초기 내각 인선을 놓고 애를 먹었다. 노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한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결국 야당의 주도 아래 국회에서 해임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감사원장과 교육부총리·경제부총리 등이 코드 인사 논란과 도덕성 문제로 줄줄이 낙마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내각 구성이 원만히 이뤄지지 못할 경우 임기 5년간 성공적인 국정 운영의 기틀을 마련해야 할 황금과도 같은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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