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로젠은 유전체 진단 기술을 통해 암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로 암을 완치하지 않고도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지난 22일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정현용 마크로젠 대표는 회사의 유전체 진단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묻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암은 통계 집계가 시작된 후 현재까지 33년간 한국인 사망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질병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암 사망자(암 사망률)는 폐암 34.1명, 간암 22.2명, 위암 16.7명, 대장암 16.4명에 이른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질병이 정복된 오늘날에도 많은 암 환자들이 힘겹게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완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치료를 위한 항암제 투여로 암세포에 내성이 생기거나 나쁜 쪽으로 변이가 돼 증상이 악화하는 경우도 많다.
마크로젠은 이런 암 환자를 비롯한 일반소비자에게 유전체 진단을 통해 질병 예측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암의 원인 유전자와 개인의 유전체를 함께 진단해 암 환자별로 맞춤형 예측 치료 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암 환자들의 병원비는 대부분 사망 1년 전에 크게 증가한다”며 “마크로젠의 목표는 유전체 진단을 통해 개개인의 유전적 기질을 파악해 암을 관리함으로써 완치하지는 못해도 암으로 죽거나 병상에서 고통받으며 수명을 연장하지는 말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암 치료를 위해 병상에 누워 항암치료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유전체 진단 기술을 통해 암이 악화되지 않도록 케어한다면 환자들도 더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며 “마크로젠의 기술로 ‘큐어(완치 목적의 치료)’에서 ‘케어(관리)’로 변화하고 있는 암 치료의 패러다임 전환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전체 진단 기술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마크로젠은 2015년 11월 유전 관련 불임 분야를 중점 연구해온 함춘여성크리닉과 공동으로 차세대 산전 유전체 검사인 ‘패스트(faest)’를 개발해 서비스하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부모의 유전체를 분석해 태어날 아기의 유전질환 보유 여부를 예측하는 ‘팜플랜(famplan)’, 임산부 혈액에서 검출한 태아의 유전자를 검사하는 ‘어부바(ABOOBA)’ 서비스를 추가했다. 전 세계 유전체 진단 서비스 시장은 2013년 약 20억달러(2조원)에서 오는 2018년 약 74억6,500만달러로 연평균 32% 성장(2014년 BCC 보고서)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 대표는 수년 전부터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유전체 진단 서비스를 이용,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꿔왔다. 가격을 대폭 낮춰 유전체 분석 서비스가 부유층 일부만 이용할 수 있는 고가의 기술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기술로 만들자는 것이다.
마크로젠은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유전체 진단을 하기 위해 2014년 1월 미국 차세대 시퀀싱(DNA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늘어서 있는지 분석하는 서비스) 장비업체인 일루미나가 발표한 최신 차세대 유전체 분석 기기(HiSeq X Ten)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하고 21대를 도입했다. 이 기기는 기존 제품보다 10배 이상 향상된 성능을 바탕으로 하루 8명 이상의 유전체를 분석, 1인당 유전체 분석비용을 1,000달러 이하로 낮출 수 있게 해준다.
정 대표는 “게놈 분석 1,000달러 시대가 열렸지만 우리는 기술 개발로 100달러에 유전체 분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누구나 부담 없이 유전체 진단 기술을 이용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마크로젠과 세계 최고 기업의 기술격차는 1주일 정도에 불과하다”며 “유전체 진단 시장 선도기업으로서 유전체 분석 서비스가 열어줄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몇 년 안에 시퀀싱 서비스 기기가 스마트폰에 탑재될 정도로 작아져 스마트폰에 침을 묻히거나 얼굴을 갖다 대면 유전체 진단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지금 마크로젠이 구매하는 장비들은 비싸고 전력소모도 엄청나다”며 “하지만 삼성 같은 기업이 뛰어들어 나노 기술을 적용하는 등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그런 미래가 현실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전체 진단은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획기적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계급론’이나 개인정보 유출 등 우려와 부정적 시각도 만만찮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사람에게 유전자는 잠재력일 뿐”이라며 “유전자가 발현하기 위해서는 유전체가 처한 환경이나 교육·노력과 같은 부분이 더 크다”며 일축했다. 그는 “유전자를 연구하면서 느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다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라며 “개인의 장단점을 만드는 유전자는 있지만 이들 유전자 간의 우열은 없고 사회적 교육이나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크로젠의 비전은 ‘바이오 산업계의 구글’이다. 정 대표는 “구글의 아이디어는 초기 인터넷이 연결될 때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 필요에 따라 정보에 가중치를 두고 이를 활용해 진짜와 가짜 정보를 솎아내는 것”이라며 “인간 유전체 진단 데이터를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가진 마크로젠이 인간 유전체 진단 데이터 중 진짜와 가짜, 혹은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골라낼 수 있다면 구글처럼 생태계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갖춘 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이 같은 비전을 달성하면 데이터를 이용해 더욱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보편적 의료복지를 제공하고 싶다는 포부도 재차 밝혔다. 그는 “통신과 데이터가 함께 발달하면 원격진료와 같은 보편적인 혜택이 가능해진다”며 “유전자 정보 자체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약력>
△1968년 서울 △1988년 서울 대원외고 △2004년 서울대 미생물학 박사 △1993년 목암연구소 연구원 △1999년 마크로젠 입사 △2007년 마크로젠 미주법인 대표 △2014년 마크로젠 게놈사업본부장 △2015년 신성장창조경제협력연합회 서울 지역 지회장 △2015년 마크로젠 대표
“한국이 무슨...” 무시하던 외국고객들,네이처誌 연구 기사 보고 태도 달라져
“매출 1조 기업 만들어보자” 서정선 회장 제안에 연구원→마크로젠행
정현용 마크로젠 대표는 서울대 미생물학과 88학번이다. 마크로젠 대표가 된 지금이야 당연한 선택 같지만 당시에는 왜 미생물학과를 선택했을까. 정 대표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언론에서 유전공학이 열어줄 가능성에 대해 대서특필했다”며 “막연하게 뿌리에는 감자,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는 신기한 식물을 만드는 것이 유전공학의 미래처럼 여겨지던 때라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지만 당시만 해도 미생물 관찰이 가능한 수준의 현미경 등 연구장비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정 대표는 “대학에서 본 것은 농활 가서 본 식물이 전부”라며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바이오 산업의 기본인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는 법 등을 배운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학부 졸업 뒤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목암연구소 연구원에 입사해 연구활동을 하던 그가 마크로젠에 입사한 것은 서정선 회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서 회장이 마크로젠을 창업하기 전인 1994년에 정 대표는 목암연구소 연구원 신분으로 서 회장이 교수로 몸담았던 서울대 의대 연구실과 두 달간 공동연구를 하게 됐다.
서 회장은 정 대표에게 바이오 산업에서 조(兆) 단위 매출 기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정 대표에게 서 회장은 상아탑에 안주하는 대부분의 교수들과 달랐다. 미국의 바이오 벤처기업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기업가정신이 돋보였다.
서 회장이 마크로젠을 설립한 1997년 해외연수 중이었던 정 대표는 1999년 국내에 들어와 마크로젠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 마크로젠은 정 대표가 합류한 이듬해인 2000년 2월 바이오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
정 대표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상장 직후였다. 그는 “서 회장이 당시만 해도 연간 연구비가 1억원이 안 되는 학계의 틀을 벗어나 제대로 연구를 해보자고 해서 상장을 했는데 투자자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이제는 연구의 성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품을 만들고 회사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고 털어놓았다.
투자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익을 내야 하는데 바이오 산업의 토양이 척박했던 당시 국내 어느 곳에서도 마크로젠의 상품을 원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바이오 기업이 문을 닫는 상황으로 내몰린다는 ‘데스 밸리(죽음의 계곡)’를 만났다. 시장을 찾아 해외로 나갔지만 어려움은 이어졌다. 지금이야 해외 고객들이 “당신이 마크로젠의 대표냐.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며 먼저 악수를 청하지만 당시에는 영 딴판이었다. 회사 소개를 듣는 해외 고객들은 ‘한국이 무슨 바이오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연구원으로 잔뼈가 굵은 정 대표는 특유의 열정으로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해갔다. 그는 2000년 자이모모나스(포도당·과당 등을 에너지원으로 살아가는 혐기성 세균)라는 미생물의 유전체 분석 프로젝트를 주도해 6개월 만에 완전 해독하는 쾌거를 이뤘다. 우리나라는 생명체의 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해낸 세계 여덟 번째 국가가 됐다. 이어 2005년에는 자이모모나스의 유전체 정보를 이용해 알코올 생산능력을 20% 이상 높인 ‘슈퍼 알코올 박테리아’를 개발, 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저널 ‘네이처바이오테크놀로지’에 게재했다.
바이오 산업 고객들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잡지인 네이처지에 마크로젠의 연구가 실렸다는 것은 마크로젠이 더 이상 해외 고객에게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정 대표는 만나는 해외 고객들에게 “우리를 믿어달라”며 호소하는 대신 해당 연구가 게재된 잡지를 내밀었다. 신뢰 부족으로 고전하던 그와 회사에 네이처 게재는 ‘보증수표’ 구실을 톡톡히 했다. 매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마크로젠은 지난해 매출 911억원을 달성했다. 150개 넘는 국가의 연구자들로부터 유전체 분석 서비스 등을 수주,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마크로젠의 주요 고객은 일반소비자가 아니라 유전체 분석 등을 의뢰하는 연구자들이다.
정 대표는 “다양한 토질이 섞인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자란 포도주가 향이 좋듯이 앞으로 닥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더 좋은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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