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4시, 세월호 리본이 걸린 광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한국 전쟁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플래카드가 보였다. 태극기 든 보수집회 참석자들이 광화문 광장까지 진출한 걸까. ‘전쟁’, ‘학살자’라는 단어에 바짝 긴장했지만 이들은 한국전쟁 때 희생된 민간인들의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모임이었다. 일렬로 서서 서명을 받던 70대 노인들은 “우린 전쟁의 참상을 겪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더욱 지지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쟁’, ‘애국’ 등 1950년대를 방불케 하는 구호들은 그간 태극기집회의 전유물이었다. 이날 광장 맞은편 태극기집회에서는 60~70대 참가자들이 해병대 군복에 썬글라스를 끼고 나와 “6·25와 공산당을 겪어봤느냐”며 “우린 그 공포 알기에 한미동맹과 국권 수호 외치는 것”이라 소리쳤다. 태극기를 흔들던 심상애(76)씨는 “6·25 겪어 보니 우릴 도와줄 곳은 소련도 중국도 아닌 미국이더라”고 말했고 유봉학(75)씨도 “후세대가 종북 공산주의에 절대 희생되어선 안 된다”며 국가안보가 불안해지지 않으려면 박 대통령 정권을 수호해야 한다고 외쳤다. 참석자들은 자신이 전쟁과 냉전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탄기국 측의 메시지가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군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은 윤호상(72)씨의 생각은 달랐다.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던 윤 씨의 아버지는 1950년 군 경찰에 연행돼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윤 씨를 비롯한 7남매도 연좌제로 인해 사회 활동을 제한 받거나 무기징역을 살았다. 윤 씨는 “진상규명을 위해 제안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진실화해법)’을 박근혜 정부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계류시켰다”며 “무조건 국가에 충성을 바칠 게 아니라 이렇게 숨겨진 사실부터 제대로 가리는 게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미국은 38선을 가른 세력이고 일본은 침략세력인데 이들이 영원히 한국 편이겠느냐”며 “애초에 타국에 의존하는 안보는 진짜 안보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인혁당 재건위를 맡고 있는 이창훈(55)씨도 “무조건적인 정권 수호는 독”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씨는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아야 쓸데 없는 전쟁이 안 난다”며 연신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서명을 요청했다. “과거사를 제대로 진상 규명하지 않고서 청년들이 좋은 시민으로 성장할 수는 없는 거예요. 대통령이 정당하게 행동했다면 태극기집회로 갔겠지만 지금은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촛불집회로 온 겁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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