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나가겠다.’ 프랑스 샤를르 드 골 (Charles De Gaulle) 대통령이 1966년 3월7일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골자다. 모두 5개 단락으로 구성돼 길지 않은 편지의 골자는 한마디로 자주국방. 드골은 나토 창립(1949년) 당시와 비교해 여건이 변화한 만큼 체제 개편을 논의해야 한다며 프랑스는 영토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은 드골의 요구를 ‘양자택일’로 여겼다. 프랑스 주둔 미군이 프랑스 장교의 지휘를 받거나 그게 싫으면 프랑스 땅에서 나가라는 드골의 편지를 받은 미국의 선택은 후자. 편지를 받은 지 4시간 만인 당일 밤 미국은 편지 내용과 ‘수용 불가’의 뜻을 언론을 통해 밝혔다. 미국은 드골이 언젠가는 나토를 떠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통고를 받고는 충격에 빠졌다. 미 행정부에서는 ‘동맹의 심장을 찌르는 일’이라며 드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드골이 나토를 나온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의 지배적인 국가’로 인정받고 싶었는데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여긴 탓이다. 길게 보면 미국에 대한 드골의 감정은 2차대전 당시부터 좋지 않았다. 자유프랑스군을 이끌던 드골은 미국에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예우와 지원을 원했지만 미국은 마지못해 프랑스 망명정부를 승인하는 정도였다. 미국이 2차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어떻게 상대했는지는 지원 금액 통계가 말해준다. 영국은 전쟁 기간 내내 314억 달러 규모의 미국제 무기와 전략물자를 제공 받은 반면 자유 프랑스는 빌고 빌어서 32억 달러 상당의 물자를 원조받았을 뿐이다.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프랑스와 영국이 공동으로 공격했던 수에즈 사태에서 미국이 소련과 손잡고 일방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이해를 짓눌렀다는 피해의식도 프랑스의 반미 감정을 키웠다.
결정적으로 드골은 전후 세계질서의 틀을 짠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에 프랑스가 초청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노하며 뼈에 새겼다. 1958년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개헌과 함께 재집권한 이후 ‘위대한 프랑스’를 만드는데 매진했던 드골로서는 앵글로 색슨(anglo saxon·미국과 영국)이 지배하는 구도를 깨는데 정책 최우선 순위를 뒀다. 미국의 반대와 비협조에도 1960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이후부터 드골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프랑스 영토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도 그 통제와 사용 여부를 프랑스와 공동결정할 때만 가능하도록 요구하고, 지중해 영불해협에 나토 소속으로 배치된 프랑스 해군을 빼냈다. 1963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비축소회담에도 구미 전승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참가하지 않았다. 나토 탈퇴는 프랑스가 추진해온 독자적인 국방 정책의 결정판이었던 셈이다. 다만 프랑스는 미국이 부당하게 주도하는 나토에서는 빠지지만 북대서양조약의 일원으로는 남아 유사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우겠다는 단서는 남겼다.
미국은 일단 프랑스에 다시 생각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나머지 14개국 회의를 소집, 분위기를 추슬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토는 존속한다고 회원국들이 결의할 무렵, 드골은 소련 방문 계획을 알리며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국방 뿐 아니라 외교 측면에서도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드골은 전운이 휩싸인 캄보디아를 방문해 서방 국가들의 베트남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연설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나토 탈퇴 선언 후속책도 줄줄이 나왔다. 프랑스는 독일에 주둔하던 육군 2개 사단과 공군 2개 비행단을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나토 군사령부에 파견 근무하는 모든 장병을 소속부대로 복귀시켰다.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과 군 시설도 나가라고 요구했다. 파리에 위치한 나토군 사령부가 벨기에 브뤼셀로 옮긴 것도 이 때다. 프랑스 주둔 미군과 그 가족 4만5,000여명도 서독과 영국의 새로운 기지로 재배치됐다. 미군이 프랑스의 나토 탈퇴로 병력을 재배치하고 사령부의 통신시설을 새로 까는데 지출한 금액만 7억 달러에 이른다.
나토 탈퇴 직후 드골은 프랑스 국민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물론 반발도 없지 않았다. 의회에서 사회당 우파 소속 일부 의원들이 드골의 독재가 심해지고 동맹을 저해했다는 이유로 정부불신임 결의안을 제출, 전체 회의에 상정했으나 반대 345표 대 찬성 137표로 부결됐다. 불신임에 필요한 242표에 훨씬 못 미쳤다. 드골이 국내 정치에서도 거둔 승리는 프랑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드골의 나토 탈퇴를 비롯한 독자적 국방·외교 노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프랑스 역대 정권의 공통 이념으로 내려오고 있다.
드골이 독자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는 다른 요인도 있다. 경제와 농업,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 미국과 대립 구도를 활용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엇보다 당시 프랑스 경제는 모범생이라는 서독을 웃돌 만큼 잘나갔다. 미국 달러화의 독주에 제동을 걸면서 프랑스는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 산업국가로 떠올랐다. 일시적이나마 일본을 누르고 세계 3위 무역대국(1·2위는 미국과 서독)에 오른 적도 있다. 경제사 측면에서도 드골은 주목할만한 대상이다. 피터 번스타인은 역저 ‘황금의 지배’에서 드골은 날로 가치가 떨어지는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리자고 제안(금 1온스당 35달러→70달러)해 미국 정부와 월가의 미움을 샀다.
윌리엄 엥달의 주장은 이런 관점에서 더욱 눈길이 간다. 20세기의 국제 정치와 경제 이권의 향방이 국제 금융·석유자본의 음모에 따라 결정됐다는 내용의 책자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비밀’을 쓴 엥달에 따르면 안보와 경제 부문에 걸친 드골의 독자 노선은 결국 그의 퇴장을 앞당겼다. 드골의 퇴장을 야기한 1968년 프랑스 학생 소요에는 ‘프랑스 독자노선’이 부담스러웠던 앵글로 색슨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지난 2009년 다시금 나토에 복귀하면서 논란을 겪었지만 사코르지 대통령은 ‘드골리즘의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드골리즘’이라며 반대파의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 프랑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았다. 구 동구권 국가들을 새로운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영역까지 전 지구로 확장하는 나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견해가 ‘독자적 자주 외교 안보=나토 미가입’ 등식을 깬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나토가 다시금 개편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나토를 경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유럽국가끼리 별도의 공동지휘부 창설 논의까지 일고 있다. 역사의 반전이 주목된다.
51년 전 프랑스의 나토 탈퇴 선언과 소련 방문, 달러화 공방과 금본위제도를 둘러싼 논쟁을 되새김질하며 오늘날 한국을 본다. 길은 오로지 외 줄기다. ‘자주국방’ 슬로건을 ‘한미동맹’이 밀어버리고 경제가 나쁘거나 좋거나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네 자리수에 붙어버렸다. 활력도 의지도 잃은 한국호에 봄이 오고 선장이 바뀌면 좀 나아지려나.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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