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서정명 정치부장 vicsjm@sedaily.com
“조기 대선이 확정된 만큼 각 정당과 대통령 후보가 선거 전 개헌에 대한 구체적인 공약을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차기 정부는 집권 전반기에 개헌을 완료해 갈등과 분열만 낳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김원기(사진) 전 국회의장은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이 나온 직후 서울경제신문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5월 안에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대선 전 개헌은 사실상 무리”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제17대 국회 전반기(2004~2006년) 의장을 지냈다. 이날 인터뷰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에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그는 올바른 권력구조 개헌의 방향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거론했다. 김 전 의장은 “약 15년 전께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를 처음 유행시킨 사람이 바로 나”라며 “모든 권력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는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정치개혁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김 전 의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이라는 비참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맹점과 허점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의회 권력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여전히 팽배해 있기 때문에 결코 국민들이 순수 내각제를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김 전 의장은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최악인 점을 감안하면 내각책임제를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며 “목숨을 걸고 거리로 뛰쳐나와 직선제를 쟁취한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권리도 끝까지 지키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 최고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선택권은 그대로 보장하면서 외교·안보·국방은 대통령이, 내치는 총리가 관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대통령제 아래서는 모든 정파가 대선에만 매몰돼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하면 협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면서 국민 통합을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전 의장은 헌재 판결로 나라가 사실상 비상체제에 돌입한 만큼 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정치권이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차기 대통령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출범해야 하는데 국가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며 “여야정 협의체와 같은 회의기구를 상시 가동해 우리나라를 위기의 수렁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 전 의장은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한 박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록 속한 정파는 다르지만 국가 원로로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 듯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매우 신중한 어조로 조언했다.
김 전 의장은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일단 헌재 판결에 대한 확고한 승복 의사를 표시하고 극단으로 갈라진 국민들에게 ‘이제는 다툼을 멈추고 각자의 생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달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하면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을 미워하고 오해했던 사람들도 마음속 분노를 어느 정도는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박 전 대통령이 태극기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자신의 정치세력을 다시 구축해 선거에 내보내려 한다면 이는 정말로 옳지 못한 일이고 국가 장래를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진솔하게 얘기하고 ‘다 함께 힘을 합쳐 국가 위기를 극복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김 전 의장은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부터 헌재 인용까지 사실상 탄핵의 전(全) 과정을 주도한 ‘촛불시민’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촛불집회에 나온 국민들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정신에 정확히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 전 의장은 “이번 시위과정을 통해 국민들은 주권자로서의 자의식을 완전히 깨우쳤다고 본다”며 “촛불시위는 정치사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됐다”고 확언했다.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은 분열의 시대와 결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김 전 의장은 “우선 좌파의 과제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해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면 진보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보수진영 역시 과거처럼 성장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기득권 세력이 아닌 소외된 자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품어 안으려는 노력을 보일 때만이 우파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차기 대선구도는 야권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을 인정했다. 그는 “야당, 그 중에서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일 앞서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며 “다만 완전국민경선으로 후보를 결정하는 만큼 변수는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적폐청산’과는 별개로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汎)여권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주자인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해서는 “출마할 것으로 본다”며 “황 대행은 혹시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해도 멀리 내다보면서 본인이 보수진영의 중심이 되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정리=나윤석·김지영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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