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10대의 대부분을 작은 공장의 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내 인생을 가로막는 천장을 뚫어보겠다’고 다짐한 당돌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공장에서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독하게 공부해 검정고시로 대학에 직행하고는 출세의 등용문이라는 사법고시까지 패스했다. 20대에 ‘천장’을 부수고 50대 중반에 접어든 이 아이는 이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원내 1당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이재명 성남시장 이야기다. ‘흙수저보다도 못한 무(無)수저’, 대한민국 대통령의 필요조건이라는 ‘인생역전 스토리’의 주인공. 이재명의 인생사와 비전, 흑역사를 해부해봤다.
①무수저 소년공을 통해 경험한 사회 불평등=이재명의 고향은 보수의 본산 대구경북(TK)이다. 지난 1963년 겨울 경상북도 안동의 청량산 자락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음주 가무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밭떼기를 유흥과 맞바꿔버렸고 아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그는 “꽃다발도 짜장면도 없는 졸업식이었다”고 회고했다(저서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소년 이재명은 성남 셋방 뒤편 가정집에 입주한 이름도 없는 목걸이 공장에 취업했다. 불과 14세 때다. 근로연령에 미달했으니 엄연한 ‘불법’ 취업이다. 그는 저서에서 “납과 염산에 얼굴을 묻고 살았다. 납 같은 게 몸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재명은 수많은 공장을 전전했다. 열다섯에 취직한 장갑 공장에서는 기능공으로 ‘승진’하는 기쁨(?)도 맛봤다. 소년공 생활은 이재명에게 ‘후천적 장애’를 남겼다. 프레스에 눌린 왼손에 골절이 일어났고 제때 치료하지 않아 성장 과정에서 손목이 뒤틀렸다. 이때 생긴 장애로 그는 지금도 넥타이를 한 손으로 맨다. 이 시장이 사회 불평등과 부조리를 경험하고 진보적인 이념성향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②인권 변호사를 거쳐 정치권 입문=이재명은 18세이던 1980년 ‘광주 사태’ 소식을 듣고 ‘전라도 새끼들은 폭도’라는 욕설에 동조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중앙대 재학 시절 광주의 진실을 알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재명은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일조한 조응천 민주당 의원, 그 반대편의 ‘진박’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연수원 동기다. 그는 저서에서 “주변 동료들에게 인권변호사를 하겠다고 너무 설레발을 쳐놓았던 터라 성적을 떠나 판사도 검사도 할 수 없었다”고 썼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노무현 당시 변호사의 말에 힘을 얻어 성남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열성 운동가였던 그는 수배를 당했고 전과자가 됐다. 성남시립병원 청원운동을 벌이다 시의회의 반대로 좌절을 맛본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은 지 14년째인 2004년 3월 성남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서다.
③사이다 발언으로 진보 아이콘 부상=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규탄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0월29일, 이재명은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속 시원한 그의 ‘사이다’ 발언은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절망하던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소년공 출신 이재명이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행동’도 사이다다. 성남에서 2번(시장 선거 1번, 국회의원 선거 1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시장에 당선된 그는 ‘파산’ 위기에 몰린 시 재정 살리기에 돌입했다. 지방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고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3년 만에 4,500억여원의 빚을 갚았다. 호화청사를 시민에게 반납했으며 무상급식과 ‘기본소득’의 일종인 청년배당을 시행했다. 그의 파격적 시정에 보수색 강한 성남 시민의 표심도 움직였다. 진보정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남시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이다. ‘헛돈 안 쓰는 도시’ ‘청년백수도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도시’ ‘학교 보내기 좋은 도시’ ‘아기 낳고 싶은 도시’ ‘노인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도시’ 등 시장 당선 때 마음에 품었던 목표에 대해 소기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생계형 취약계층 신용대사면’ ‘기본소득 도입’ ‘법인세 인상’ ‘재벌구조 해체’ ‘선택적 모병제’ 등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공약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건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재명의 정치 이력 때문이다. 그는 저서 ‘대한민국 혁명하라’에서 “혁명에 준하는 개혁”을 공언했다. 하지만 재정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대중에 영합하는 공약을 대거 내놓는 것은 정책 안정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선동가 이미지가 강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곡절 많은 인생사이기에 숨기고픈 약점은 있다. 포털사이트에 ‘이재명’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음주운전’ ‘형’ 등이 상위에 랭크돼 있다. 2005년 변호사 업무를 위해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것은 씻을 수 없는 흑역사다. 이재명도 “변명의 여지 없는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형수에 대한 막말은 ‘가족의 시정 개입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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