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뉴턴 연금술과 첼로너의 화폐 위조





“자연과 자연법칙이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게 밝아졌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의 추도식(1727)에서 알렉산더 포프가 읊은 추도사다. 당대의 유명 시인이던 포프는 이 유명한 추도사를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가져왔다.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부르는 노래에서조차 뉴턴은 칭송의 대상이었다. 영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최고의 자연과학자로 존경받았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학자였지만 아이작 뉴턴은 사람들과 쉽게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친구가 많지 않았다. 최소한 세 명과는 평생을 적대관계로 지냈다. 둘은 뉴턴에 버금가는 학자다. 로버트 훅과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관찰한 실험과학자이자 건축가로도 유명한 훅을 뉴턴은 적수로 여겼다. 뉴턴은 7년 위인 훅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뉴턴에게 명성을 안겨준 대작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출간(1686) 직후. 훅은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자신의 이론인 역제곱법칙을 저자 인용도 없이 썼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는 이 때부터 완전히 틀어졌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의 원리를 두고 적대 관계였다. 누가 먼저 미적분의 원리를 먼저 파악했는가를 놓고 영국과 독일 지역은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뉴턴 출생 보다 4년 늦은 1646년 작센 선제후령(오늘날 독일 작센주)에서 태어난 라이프니츠는 수학과 천문학, 물리학은 물론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독일과 영국의 논리철학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계산기계를 발명해 오늘날 컴퓨터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요즘은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거의 동시대에 별개로 미적분을 발전시켰다는 게 정설로 통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립각을 세웠다.

뉴턴이 적대시한 세 번째 인물의 이름은 윌리엄 챌로너. 저명 인사가 아니었다. 과학이나 철학에 업적을 남기기는커녕 평생 나쁜 짓을 하다 교수형 당한 런던 암흑가의 인물. 세계적인 학자 뉴턴이 어떻게 그런 사람과 접하게 됐을까. 조폐국 감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뉴턴은 나이 54세인 1696년, 학교를 완전히 떠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런던 조폐국으로 자리를 옮긴 것. 뉴턴은 나이 80세 넘어 건강이 나빠진 뒤에서야 조폐국을 나왔다. 뉴턴의 인생 후반부는 학자라기 보다는 금융인 겸 경제학자 겸 경제경찰로 보낸 셈이다.

당시 런던 조폐국은 조폐국장과 감사, 감독관 3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뉴턴이 맡은 감사의 업무는 두 가지였다. 화폐 주조기 등 조폐국 시설 관리와 화폐 위조범 색출. 뉴턴은 왜 존경받는 과학자이자 강의 부담도 별로 없는 교수 자리를 내놓고 말똥과 석탄 타는 냄새로 찌든 조폐국을 택했을까. 돈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연봉은 약 100파운드, 조폐국 감사 자리는 400 파운드가 넘었다. 뉴턴은 존 로크(정치인·사회철학자이자 사회계약 아래 삼권 분립과 사유재산권 보장을 강조한 ‘정부론’의 저자) 등 친구와 당시 재무부 장관에게 부탁해 조폐국 감사 자리를 얻었다.

과학자가 아닌 조폐국 경영진으로서도 뉴턴은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부임하자마자 하루 16시간씩 일하고 경제학을 공부했다. 조폐국의 200년 전 기록까지 살펴보고 업무 전 과정을 익혔다. 부임 1 개월 뒤 뉴턴은 조폐 전문 행정가로 변신했다. 조폐국의 업무에도 일대 변화를 몰고 왔다. 복잡한 천체를 계산하던 수학 실력으로 조폐국 인력과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인 말(馬), 압연기와 절단기 등 기계의 수요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조폐국 납품업자들이 관례처럼 요구해온 부당 청구액의 실태도 뉴턴은 바로 파악했다. ‘황금의 지배’를 지은 피터 번스타인에 따르면 뉴턴이 남긴 화폐제도에 대해 언급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뛰어난 편이라고 한다.

뉴턴이 조폐국 감사로 부임하던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 현안은 통화 시스템의 안정. 윌리엄 3세의 잇단 전쟁으로 예산 쓸 곳이 많아졌지만 조폐국의 주화 발행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노후 시설로 인해 생산 능력이 떨어졌다. 마침 영국 정부가 화폐 대개혁에 나서던 시절이어서 돈은 더욱 모자랐다. 화폐 대개혁이란 훼손된 돈을 바꾸는 작업. 금화나 은화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자르는 통에 액면 가치를 밑도는 주화가 많아졌다. 동전을 깎는 행위를 막기 위해 영국은 대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은화의 가장자리에 작은 홈(mil)를 촘촘하게 파서 톱니바퀴가 없으면 부정 지폐로 간주했다.



새로운 돈이 나왔지만 옛날 주화는 여전히 많이 돌아다녔다. 영국 재무부는 모서리가 깎여나간 주화를 새로운 주화로 바꿔주기 위해 700만 파운드가 새로 주조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웠다. 문제는 조폐국의 최대 생산량이 하루 1만5,000파운드 남짓했다는 사실. 모서리가 갈린 옛 은화를 모두 새로운 은화로 바꾸려면 9년 세월이 걸릴 판이었다. 뉴턴은 이런 상황에서 업무 흐름을 개선하고 설비를 증설해 3년 만에 할당량을 채웠다. 영국인들이 ‘화폐 대개혁’이라고 부르는 새 은화 교체작업도 훨씬 빠르게 마쳤다. 재무장관은 ‘뉴턴이 그 자리에 없었으면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라며 뉴턴을 추켜세웠다.

뉴턴은 화폐 위조범과도 전쟁을 치렀다. 영국은 위폐가 발견될 경우 화폐 주조에 참여했던 직공들과 위조범들의 손목을 잘라 버렸지만 위조 사례는 오히려 늘어났다. 국왕의 얼굴이 도안에 포함된 주화를 위조할 경우 대역죄로 교수형 당해도 위조화폐 주조차익을 누리려는 욕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폐국 감사 뉴턴 을가장 힘들게 했던 위조범 윌리엄 첼로너 역시 욕심 하나로 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못 공장 견습공으로 시작했던 그는 칠장이, 성인용품 제조 등을 전전하며 위폐 제조의 기본기술인 금속과 염료를 취급하는 방법을 익혔다.

돈이 없을 때면 푼돈을 위조해 쓰면서 점점 기술이 좋아지고 벌이와 씀씀이도 커졌다. 다른 위폐범들과 차이도 컸다. 그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오히려 기회로 바꿨다. 비결은 배신. 동업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수법으로 위기 때마다 벗어났다. 처음으로 본격 위조에 나섰을 때는 일당인 인쇄공 2명이 옛 왕조(스튜어트)를 복원하려는 반역자라는 거짓 진술로 구속과 수감을 피했다. 인쇄공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반란의 기운을 사전에 막은 공로로 1,000파운드 상금까지 챙겼다. 의회나 국무장관 등에도 위조범을 잡은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시로 올렸다.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는 데다 책까지 출간한 챌로너에 대해서는 우호세력이 적지 않았다. 장관들도 그를 만나면 지원금을 건냈다. 챌로너를 의심 선상에 놓고 경계를 풀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뉴턴이었다. 챌로너는 돈이 떨어지면 위폐를 찍어 뉴턴의 감시망에 여러 번 걸렸으나 위기마다 빠져나갔다. 뉴턴은 챌로너를 구속하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복역 중인 다른 죄수를 빼내 선술집에서 형량을 흥정하고, 감옥에 갇힌 챌로너를 감시하는 스파이를 3진까지 운영하며 정보를 빼냈다. 챌로너는 마침내 배심원단에게 교수형 평결을 받고 1699년 3월23일 교수형 당해 죽었다.

뉴턴은 화폐대개혁과 위조범 색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폐국장 자리에 앉았다. 끝은 좋았을까. 반반으로 보인다. 토머스 레벤슨 저술가 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의 저서 ‘뉴턴과 화폐위조범’에 따르면 뉴턴은 조폐국장으로 재임하는 27년 동안 연 평균 1,650파운드씩 받아 여생을 풍요롭게 보냈다.

다만 인생 말년이 상대적으로 쪼였다. 주식투자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뉴턴은 초기 자본주의 3대 버블의 하나인 초기 자본주의 3대 버블의 하나인 ‘남해회사 사건’ 당시 2만 파운드에 이르는 손실을 입은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복잡한 천제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