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정치권은 근로기준법 개정에 비교적 낙관적이다. 국회 일정상 대통령선거 이후로 넘겨졌다지만 ‘52시간’이라는 전체적 줄거리에는 4당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나머지 세부적 견해차는 시간을 두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각 당 간에 공감대를 이뤘다는 52시간은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 만약 이런 전제 자체가 왜곡돼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한국인은 노동시간 개념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인가. 통계상으로는 그렇다. 2015년 기준 연간 2,11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766시간을 크게 웃돈다. 정치권에서 ‘저녁 있는 삶’이라는 달콤한 말로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긴 월급쟁이들로서는 노동시간을 줄여주겠다는 약속만큼 즐거운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인의 노동시간을 세분해서 살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한마디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성 있는 노동 패턴이 발견되는 것이다. 노동개혁의 제일 과제인 ‘노동시장 유연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노동시간 유연성’만큼은 최고 수준이다.
우리네 노동자들, 특히 화이트칼라 중에 제대로 노동시간을 지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근무시간에 차를 마시거나 담배를 즐기고 오후에는 짬을 내 목욕탕에서 피로를 풀기도 한다. 책상에 앉아서도 잠시 틈만 나면 주식 사이트를 열거나 모바일게임에 빠져들기도 한다. 회사 전화로 사적 업무를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근무시간에 병원 치료를 받거나 이발소에도 다녀온다.
따라서 한국인 노동현장에서 허용되는 이런저런 여유를 감안한다면 주당 평균 노동시간 중 적어도 4 내지 5분의1은 회사 일이 아닌 사적 영역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최근 짬짜미가 많이 줄긴 했어도 이런 소소한 여유까지 감시하고 체크하려 들면 회사 간부나 경영자는 ‘정(情)의 나라’ 한국에서 각박한 인간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만일 이런 주장을 수긍하지 못하겠다면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길면서도 생산성은 OECD 회원 34개국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반박할 셈인가. OECD가 17일 발표한 한국의 구조개혁 평가보고서가 이를 압축 표현하고 있다. “근로시간은 회원국 중 가장 길고 생산성은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OECD는 2009~2015년 한국의 노동생산성 연평균 증가율이 1.9%로 직전 7년 평균(2.8%)보다 0.7% 포인트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13년 기준 29.9달러로 최고 수준인 룩셈부르크(69달러)나 노르웨이(63.8달러)의 절반 미만이다. OECD가 아니라 현대차의 생산성 비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차량 한 대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HPV·hours per vehicle)을 보면 현대차는 2014년 6월 말 기준 국내 공장의 HPV가 26.8시간으로 미국(14.7), 중국(17.7), 체코(15.3), 인도(20.7) 등 해외 공장과 큰 차이가 난다.
물론 이런 수치를 한국인의 자질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단지 노동시간이 길면서도 제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 표현해 ‘여유롭고 유연성 있게’ 일하다 보니 단위노동시간당 생산능력을 평가하는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노동현장은 특이하다. 유연하고 느슨한 노동시간을 즐기는 대신 보다 장시간의 노동으로 벌충해준다는 데 노동자와 고용주가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것일 뿐이다.
국민소득을 높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생산성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생산성을 룩셈부르크나 노르웨이만큼만 올려보라. 그럼 국회의원의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국회의원들은 지금 남 말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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